
유교 문화권에서 어머니의 이상형은 단연 맹자의 어머니 ‘맹모’를 꼽는다.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은 물론, 공부를 중도 포기한 아들에게 베틀의 실을 끊어 경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기업인들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떻게 자녀들을 키웠기에 한국 최고의 CEO로 만들었을까. 다른 위대한 보통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는 어떻게 다를까. 최근 출간된 어머니의 힘(한결미디어 펴냄)은 이런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 한성실 여사를 필두로 한국 최고 경영인을 길러낸 어머니들의 가르침을 연재할 예정이다. 다음은 두산그룹 박용곤 명예회장 어머니 명계춘 여사의 이야기다.
가족 간 사랑 전도사 형제간 우애‘강조’
명계춘 여사는 두산그룹 박용곤 명예회장의 어머니다. 명 여사는 1913년 1월 30일, 부친 명태순 공과 모친 백상덕 여사 사이의 3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숙명고녀(여고) 재학 중에는 연식정구 선수로 뛸 만큼 운동에도 소질이 뛰어난 학생이었다.
박두병(호는 연강, 전 두산그룹 회장, 대한상의 회장, 1910~1973)은 경성고상 2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1930년 무렵, 일흔이 가까워오는 아버지(매헌 박승직,1864~1950)가 아들의 결혼을 서둘렀다. 당시는 부모가 혼처를 정해주던 시절이었다. 얼마 전부터 박두병 총각의 귀에도 명 씨 가문의 명계춘 처자 이야기가 들려왔다. 조카와 숙명고녀 동기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 해 뒤인 1931년 5월, 두 사람은 혼인을 하게 되었다. 신부는 여고를 갓 졸업한 열여덟이요, 연강의 나이는 스물 하나였다. 결혼식장은 대한상공회의소 안에 있는 공화당이었다. 예식장의 실내장식에서부터 식도원에서의 피로연에 이르기까지 당시 상공업계 실력자 매헌의 장남 결혼식답게 성대한 예식이었다. 이 결혼식이 두산과 상공회의소를 이어준 인연이 끈이었다. 후일 명 여사의 남편 연강, 두산 출신 정수창 회장 그리고 아들 박용성 회장까지 상공회의소 회장으로서 중책을 맡았다.
신부에서 며느리, 어머니까지
명 여사는 엄격하게 개화된 집안 환경에서 귀여움을 받고 자란 처자였다. 성격 또한 모나지 않고 얌전해 순종의 미덕도 겸비하고 있었다. 때로는 순발력을 발휘해 시댁의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했다. 그러나 대갓집 맏며느리의 자리로 18세의 명계춘 신부가 감당하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매일 끊이지 않고 친척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게다가 30명에 이르는 ‘박가분’ 직공들의 식사까지 도맡아야 했으니, 새색시는 하루하루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신혼의 달콤한 정감에 젖어들 새도 없었다.
위로가 된다면 시아버지 매헌의 지극한 며느리 사랑이었다. 8월 들어 태기가 있자 시아버지의 사랑은 한층 더 깊어졌다. 며느리가 궂은일을 하는 것을 보면 주위 사람들을 나무라기까지 했다.
1932년, 결혼 이듬해에 큰아들 용곤이 태어났다. 이로써 아내와 며느리 역할 뿐 아니라 어머니 역할까지 하게 된 셈이다.
당시, 연강은 운수업에 손을 대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박가분제조본포’를 손수 경영했듯이 운수업은 명 여사가 직접 운영했다. 운수업은 그런대로 잘되었다. 하지만 운전사가 제때 들어오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되어 안심하고 잠들 수가 없었다. 정비공의 부주의로 두 차례 화재를 겪기도 했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운수업은 계속 되었다.
악재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남편인 연강이 1949년 늑막염 진단을 받은 것.
“최선을 다했지만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라는 의사의 진단 또한 명 여사의 마음을 쓰러 내렸다. 집안 분위기도 침울해졌다. 페니실린을 4시간 간격으로 투여해야했기에 명 여사가 주사 놓는 법을 익혀 직접 시료했다. 딸 용언이 주사기를 소독하는 등 시중을 들었다.
가족들의 보살핌 덕에 연강의 병이 호전될 즈음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가족들은 부산 동광동으로 피난했다. 피난 직후 명 여사는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챙겨온 물건을 내다 팔았다.
‘박승직상점’의 문을 닫을 때 집에서 쓰려고 남겨두었던 포목과, 해방 전부터 딸 용언의 혼숫감으로 모아둔 옷감이 요긴하게 팔렸다.
“자, 이제 우리는 낯선 이곳 부산에서 새로운 각오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옛날 생활은 당분간 잊어야 한다”
명 여사는 이렇게 아이들에게 당부했다. 이는 곧 자신에게 다짐하는 말이기도 했다. 1951년 명 여사의 가족들은 초량동으로 이사했다. 300미터 언덕 아래 공동 수도나 뒷산 샘터에서 물을 길어와야 했으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 부족한 물로 식사는 물론 두산상회 간부들의 옷까지 빨아야 하는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후 명 여사도 시어미니가 됐다. 명 여사의 며느리들은 모두 연지동 양옥에서 시집살이를 했다. 그래서 그곳을 훈련소라 부르기도 했다. 장남이 분가한 뒤부터 매주 일요일이면 연지동에 자녀들이 모였고, 연강은 그때마다 겸양지덕과 형제간의 우애 등을 강조했다. 며느리들에게는 형제가 많으니, 특히 화목할 것을 가르쳤다.
명 여사의 절약정신은 몸에 배어 있었다. 포장지는 물론 헌옷이나 못 쓰게 된 커튼 등을 모아두었다가 필요한 곳에 활용했다. 노는 불에는 팥을 삶는다든가 하다못해 물이라도 끊였다. 다 큰 자식들에게도 속옷이나 양말이 해지면 꿰매서 다시 입게 했다. 어머니의 이런 알뜰한 모습이 자식들에게는 살아 있는 교훈이었다.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에게 ‘서독제 기계’라는 별명을 지었다. 명 여사의 손을 거치면 모든 게 정확했기 때문이다. 송편을 빚을 때에도, 하나하나가 기계에서 뽑아낸 것처럼 똑같았다.
며느리를 맞아들일 때는 아들의 생년월일시가 적힌 상자에 배꼽 떨어진 것, 돌 옷, 신발, 앨범 등을 담아 물려주었다. 자식들이 분가해 나갈 때는 살림도구는 물론 휴지에서 각종 비누에 이르기까지, 또 당분간 먹을 식품까지 챙겨주었다.
명 여사는 두산그룹 명예회장인 큰 아들 용곤, 성지건설 회장 둘째아들 용오, 두산중공업 회장 용성, 두산그룹 회장 용현, 두산인프라코어 회장 용만을 비롯한 많은 자손들과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내다 2008년 9월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자료제공:한결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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