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연재 재벌회장 어머니의 자식교육법 전격 공개 제 5탄 - 박삼구 편
인기연재 재벌회장 어머니의 자식교육법 전격 공개 제 5탄 - 박삼구 편
  • 박지영 기자
  • 입력 2009-06-30 11:24
  • 승인 2009.06.30 11:24
  • 호수 792
  • 2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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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사회봉사에 헌신한 ‘광주여성의 어머니’
유교 문화권에서 어머니의 이상형은 단연 맹자의 어머니 ‘맹모’를 꼽는다.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은 물론, 공부를 중도 포기한 아들에게 베틀의 실을 끊어 경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기업인들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떻게 자녀들을 키웠기에 한국 최고의 CEO로 만들었을까. 다른 위대한 보통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는 어떻게 다를까. 최근 출간된 (한결미디어 펴냄)은 이런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 한성실 여사를 필두로 한국 최고 경영인을 길러낸 어머니들의 가르침을 연재할 예정이다. 다음은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어머니 이순정 여사의 이야기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어머니 이순정 여사는 이임근 공의 둘째딸로 전남 영광군 백학리에서 태어났다.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주와 이순정 여사를 맺어준 사람은 아름 아닌 박 창업주의 친구였다. 어느 날, 박 창업주는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그곳에서 한 처자를 보게 된다. 바로 주인집 둘째딸 이순정 여사였다. 박 창업주는 귀신에 홀린 듯 이 여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노란색 저고리에 윤기 나는 검은머리, 청초하고 매력적인 이 여사 모습에 박 창업주의 가슴은 심하게 떨렸다. 박 창업주는 친구 부인의 중매로 1929년 9월 이 여사와 선을 보게 된다. 그해 12월 11일 스물아홉 살의 박 창업주와 스무 살의 이 여사는 그렇게 백년가약을 맺었다.


백년의 섬김

박 창업주는 마흔여섯 살 늦은 나이에 운수사업에 뛰어들었다. 우선 박 창업주는 지인들에게 17만원을 빌려 포드 디럭스 세단 5인승 택시 두 대를 사들였다. 회사도 ‘광주택시’라 이름 지었다. 이 무렵 이 여사는 늑막염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택시 두 대로 시작한 사업은 개업 첫날부터 순조롭게 출발했다. 택시 두 대가 잠시 멈춰 있을 사이도 없이 바삐 움직였다. 1948년에는 광주여객을 세워 버스운수업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이 여사는 광주여객사업이 출발할 때부터 내조에 모든 정성을 다했다. 운행 개시 첫날 이 여사는 집에서 손수 시루떡을 마련했다. 그리고 첫차가 출발하기 전 버스 앞에 시루떡과 돼지머리를 놓고 정성껏 고사를 올렸다.

사업 규모가 커갈수록 이 여사의 집 식구들도 늘어났다. 이 무렵 이 여사의 집에는 넷째아들 친구까지 자식 여섯에, 남편 쪽 조카들과 이 여사의 친정 조카들까지 같이 기거하고 있었다. 또 남편의 고향마을 젊은이들이 광주여객에 취직하겠다고 심심찮게 올라와 머물렀다. 때로는 차장과 정비공들까지 함께 머물러 집 안은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들에게 밥을 해주느라 이 여사는 무척 힘이 들었지만 그런 내색은 일체 보이지 않았다.

때때로 남편 박 창업주는 이 여사에 대한 고마움을 “보살이 따로 있겠소. 당신 같은 사람이 보살이지.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을 아내로 얻었으니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오”라고 표시했다.

그러나 6·25전쟁은 탄탄대로를 걷던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전쟁 와중 박 창업주가 그만 인민군에 체포돼 감금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 여사는 남편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피난지인 나주에서 광주로 올라와 형무소로 남편을 찾아갔다.

이후 이 여사는 금남로 집을 지키며 매일 부처님께 불공을 드렸다. 마루 한편에 제단을 마련해 정화수를 떠놓고 남편이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또한 소식조차 알 길 없는 큰아들 성용이 무사귀환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치성이 통했는지 인민군은 퇴각했고, 박 창업주는 무사히 풀려났다. 그동안 서울 하숙집에서 숨어 지내던 큰아들 성용까지 집으로 돌아왔다. 큰아들 성용은 전쟁이 나고 넉 달 동안 연락조차 되지 않던 터였다.

이 여사는 당신 자식의 친구들에게도 언제나 각별했다. 금남로 집에 살 때는 당시 중학생이던 아들 정구의 친구들이 찾아와 책도 읽고 노래도 부르며 놀곤 했다. 아들과 친구들은 운동도 하고 끼니를 거른 채 바둑을 즐기기도 했다. 이럴 때면 이 여사는 쇠고기며 돼지고기에 두부를 숭숭 썰어 넣은 전골을 마련해주곤 했다.

당시 지배인 직함을 가지고 있던 둘째아들 동산(박정구)은 술이라도 한잔하게 되면 밤늦게 일행을 데리고 귀가해 잠자리에 들곤했다. 그런 날에는 새벽에 조용히 아들이 잠자고 있는 방에 들어가 이불도 덮어주고 커튼도 쳐주었다. 2층이라 아침햇살에 눈이 부셔 잠을 깰까 염려한 것이다.


광주의 어머니

박 창업주의 성품은 불같았다. 심지어 큰아들 성용이 미국인과 결혼한다고 하자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이 정서에 맞지 않는다면서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이 여사는 둘째딸 강자 결혼식 참석차 미국을 방문했을 때 비로소 큰며느리와 손녀딸을 볼 수 있었다. 아들하고는 무려 10년 만의 만남이었다.

이처럼 박 창업주는 옳지 않다고 느끼면 본인의 불이익은 생각하지 않고 상대를 올곧게 꾸짖는 성품이었다. 이런 불같은 남편 성품 때문에 마찰이 없도록 주변을 관리하고, 집안의 화목과 우애를 위해 애쓰는 것은 이 여사의 몫이었다. 너무나 직선적이고 강하기만 한 박 창업주의 성격을 이 여사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감싸 안은 것이다. 이것은 이 여사의 성품이 천성적으로 부드럽고 따스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전 박 창업주와 이 여사는 다정다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휴일이면 극장에도 가고, 화투놀이도 했다. 그렇게 55년 세월을 함께해온 남편 박 창업주가 1984년 6월 무엇이 급한지 먼저 이 여사 곁을 떠났다.

이후 이 여사는 주로 광주에 거주하며 1962년부터 40여 년간 대한적십자사 광주·전남지부의 활동을 비롯해 불우시설, 모자가정, 소년소녀가장 돌보기에도 앞장서 노력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을 도우면서도 드러내지 않고, 묵묵하게 헌신했다. 또한 1987년 선행화장학회, 1997년 장애인장학회, 2005년 어머니장학회를 설립해 해마다 1억원가량의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충·효·예 실천운동 광주시연합회’는 이 여사의 이런 사회봉사 행적을 기려 2006년 11월 ‘빛고을 인륜대상’을 수여, ‘광주 여성의 어머니’라고 칭하기도 했다.

한편 박 창업주와 이 여사는 슬하에 큰아들 성용(금호아시아나그룹 2대 회장)을 비롯해 큰딸 경애(배영환 삼화고속 회장 부인), 둘째아들 정구(그룹 3대 회장), 셋째아들 삼구(현 그룹 회장), 넷째아들 찬구(그룹 화학부문 회장), 다섯째아들 종구(전 교육과학기술부 2차관), 작은딸 강자(금호미술관장), 셋째딸 현주(대상홀딩스 부회장) 등 5남 3녀를 두었다.

[박지영 기자] pjy0925@dailysun.co.kr
[자료제공:한결미디어]

박지영 기자 pjy0925@da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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