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인 달군 어머니의 사랑

유교 문화권에서 어머니의 이상형은 단연 맹자의 어머니 ‘맹모’를 꼽는다.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은 물론, 공부를 중도 포기한 아들에게 베틀의 실을 끊어 경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기업인들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떻게 자녀들을 키웠기에 한국 최고의 CEO로 만들었을까. 다른 위대한 보통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는 어떻게 다를까. 최근 출간된 (한결미디어 펴냄)은 이런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 한성실 여사를 필두로 한국 최고 경영인을 길러낸 어머니들의 가르침을 연재할 예정이다. 다음은 ‘철강왕’ 박태준 포항제철(현 포스코) 명예회장의 어머니 김소순 여사의 이야기다.
1927년 음력 9월 29일, 경남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일대)의 갯마을에 사내 아기가 태어났다.
박봉관과 김소순, 젊고 평범한 이들 부부는 토끼해에 얻은 첫 아이의 이름을 ‘태준(泰俊)’이라 지었다. 한학을 공부한 남편이 아내에게 ‘장차 크게 잘 돼라’는 뜻이라고 풀이해주었다.
젊은 어머니는 친척들에게 태몽을 들려줬다.
“올해 정초 어느 날 밤에 달음산이 갑자기 커다란 용으로 변해 용트림하는 꿈을 꿨는데, 그런 다음에 태기가 있었어요.”
태몽의 주인공인 ‘달음산’은 지명이 ‘철(鐵)’과 관련 있다. 달이 뜬다 하여 ‘달음산’이라고도 하나, ‘달구어진 산’을 뜻하기도 한다.
예사롭지 않은 태몽
일본 식민통치 하에 있었던 1930년대 초, 가난한 어촌마을 임랑리에도 일본인들의 출입이 빈번해 졌다.
어민들의 공동어장과 미역바위 어업권은 이미 일본인들 손에 들어가 있었다. 김소순 여사의 큰시아주버니 박봉줄 공은 이런 일본인들과 어민들을 연결하는 마을 대표였다.
일본인들의 잦은 출입은 박봉줄 공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얼마 후 남편 박봉관 공마저 현해탄으로 건너갔다. 김소순 여사와 아들 태준은 고향에 남겨둔 채였다.
1933년 8월 하순, 집배원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전해져 왔다. 일본 아타미로 찾아오라는 남편 박봉관 공의 편지가 배달된 것이다. 박 회장의 나이 만 여섯 살 되던 해 일이다.
김소순 여사는 단걸음에 남편이 기다리는 일본으로 향했다. 시모노세키 부두에 도착하자 20대 중반의 조선인 사내가 ‘박태준 모자’라고 쓴 한문 팻말을 들고 서있었다. 남편에게서 미리 일정상 마중을 나오지 못한다는 얘길 들은 터였다.
시모노세키에서 남편이 있는 아타미까지 꼬박 이틀이 걸렸다. 이 무렵, 아타미에서는 터널공사가 한창이었다. 남편도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따뜻한 기후만큼이나 동네 인심은 너그러웠다. 아들 태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아이들과 잘 어울렸다. 아타미에서의 생활은 3년쯤 계속됐다.
1940년대 즈음, 이들 가정에 시련이 닥쳐왔다. 남편 박봉관 공이 토건업에 손을 댔다가 크게 낭패를 본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온 김소순 여사는 경남 양산에서 기장미역 행상에 나섰다. 미역을 머리에 이고 동해 남부선 열차편으로 부산까지 가서 파는 억척스러운 삶이었다. 이런 억척스러움으로 김 여사는 여섯 남매를 기르고 가르쳤다.
동해-부산 미역행상
박태준 명예회장이 대한중석 사장에 취임했을 때 일이다. 하루는 박 회장이 어머니 김소순 여사에게 미역장사를 그만두라고 간곡히 권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김 여사는 단호했다.
“이게 내 살림 밑천 아이가? 그런데 와 그만두라 카노. 내 움직일 수 있는 데까지는 계속하겠다”
김 여사는 맏아들 태준이 포항제철 사장이 된 1968년까지 이 일을 계속했다.
자식을 향한 김 여사의 애끓는 모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박태준 회장이 포항제철 사장을 역임하고 있었을 때 일이다.
힘들고 지칠 때면 박 회장은 가끔씩 고향집에 들르곤 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 어촌마을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박 회장 또한 행여 단잠에 빠진 어머니가 자동차 엔진 소리에 깨진 않을까 조심했다. 그러나 이러한 수고는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아들 태준이 마을에 도착할 무렵이면 김 여사는 어김없이 문밖에 나와 기다리다 아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김 여사는 아들이 오는 날이면 언제나 술상을 차려주었다. 그리고는 투박한 손으로 기장미역을 둘둘 말아 고추장을 듬뿍 찍어 아들 입에 넣어주곤 했다. 그것은 아들 태준에게 단순한 미역이 아니라 어머니 사랑 그 자체였다.
김소순 여사의 죽음
6공화국에서 여당 대표를 지낸 박태준 회장은 YS(김영삼)정권이 들어선 92년 12월 포철 계열사와 협력사로부터 56억원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3년여 정치적 망명생활을 보내야 했다. 이 무렵 김 여사는 고혈압과 심장병 등으로 고생을 했다.
1년 7개월 동안 오직 아들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김 여사는 끝내 1994년, 88세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망명 아닌 망명을 떠나야만 했던 박 회장은 어머니 임종소식을 전해 듣고 곧장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결국 김 여사는 자신의 죽음으로 머나먼 타국에서 눈치 보며 살아야 했을 아들 태준을 다시 고향땅으로 돌아오게 했다.
[박지영 기자] pjy0925@dailysun.co.kr
[자료제공:한결미디어]
박지영 기자 pjy0925@da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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