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리맨이 잘 돼야 대한민국이 큰다
샐러리맨이 잘 돼야 대한민국이 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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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01-07 14:34
  • 승인 2009.01.07 14:34
  • 호수 90
  • 2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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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리맨 영웅열전
강덕수 회장 · 박현주 회장

샐러리맨들은 우울하다. 대학입시보다 더 힘든 바늘구멍 같은 취업문을 비집고 들어가면 치열한 생존경쟁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에서 살아남는다 해도 삼팔선(38세가 한계), 사오정(45세가 정년)이라는 조기 퇴직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불안감을 반영하듯 직장인을 뜻하는 ‘Salaryman’과 학생을 뜻하는 ‘Student’의 합성어인 샐러던트(Saladent)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직장인들은 공부에 몰두하며 자기 개발에 전념하고 있다. 대학생들도 취업불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대한민국은 공무원공화국’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공시(공무원시험) 열풍에 빠져있다. 그러나 이처럼 우울한 샐러리맨들에게 한줄기 빛처럼 서광을 비춰주는 사람들이 있다. 노숙자에서 2000억원대 자산가로, 창업 7년 만에 수출 1000배로 이끈 CEO로, 창립 10주년 만에 금융지존회사로 이끈 사람들이다. 모두 얇은 봉투를 받아가는 평범한 샐러리맨에서 신화를 창조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바로 돈이라는 가장 찬란한 예술을 활짝 개화시킨 영웅들이다. 불투명한 미래로 앞날이 보이지 않는 요즘, 샐러리맨 영웅들이 탄생하기까지 비밀스럽고 신비한 그들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본다.

학비 날린 문제아에서
금융 자본시장의 선두로…미래에셋 박현주 회장

명동 증권가를 돌아다니며 주식으로 날린 등록금과 하숙비·용돈 등을 갚기 위해 연리 15% 조건으로 어머니에게 돈을 빌린 간 큰 학생·대학원생 시절 명동 사채시장의 ‘큰손’이자 1960년대 말부터 주식투자로 명성을 떨치던 백 할머니를 무작정 찾아가 ‘좀 가르쳐달라’며 뒤를 졸졸 따라다닌 열정적인 남자. 그는 한국 자본시장의 총아인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이다.

박 회장은 1986년 동양증권에 입사 45일 만에 대리, 1988년 동원증권으로 옮겨 입사 3년 만에 전국 최연소 지점장,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연간 전국 약정 1위 지점, 37세 최연소 이사 자리들을 따냈다. 그리고 이듬해 약 10년간의 봉급쟁이 생활을 청산했다.

다른 대기업들이 투자를 꺼려했던 포털사이트 다음에 24억원을 투자해 단 6개월 만에 1000억을 벌어들인 종자돈으로 미래에셋을 일궈낸 것이다. 박 회장은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자기자본 225배 증가, 주식형펀드 시장 점유율 30%초과라는 아찔할 정도의 비약적 발전을 이룩했다.

또 박 회장은 1997년 창업 이후 최초의 뮤추얼펀드인 ‘박현주 펀드 1호’를 선보여 100%에 가까운 수익률을 기록하며 펀드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국내 최초로 뮤추얼펀드와 부동산펀드를 선보였고 주식형펀드 최고 누적수익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선택과 집중’ 전략을 통해 ‘10년 대박의 신화’를 써왔다.

‘최초’와 ‘최고’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미래에셋. 24억으로 23조원을 만든 1000배신화의 주인공인 박 회장의 꿈은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 진행 중이다.


신용불량자에서
신흥 금융그룹의 총아로…골든 브릿지 이상준 회장

위장취업자, 막노동, 전태일 노동자료연구소 정보화팀장, 보험노조연맹 홍보부장이라는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 골든 브릿지 금융그룹 이상준(40)회장은 수많은 명함을 가져야 했다. 수없이 무너지고 또 무너졌기 때문이다. 평범한 샐러리맨에서 사업가로 변신해도 실패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993년 이후 부동산 시행사, 인테리어 회사와 식자재 납품 등 6번의 창업을 하면서 부도는 어렵게 피했지만 7번째는 상황이 달랐다. IMF쇼크가 몰아친 1997년 건물철거 회사는 결국 부도가 났다. 이 회장의 집은 경매에 넘어갔고 신용불량자가 되어 노숙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재기를 노리던 이 회장은 2000년 친척 50명에게 10억 원을 긁어모아 구조조정 회사인 골든 브릿지를 세웠다. 인생의 마지막 기회였다. 그리고 현재 골든 브릿지는 7개 계열사와 2000억 원대 자기자본, 4000억 원에 이르는 고유자산을 보유한 거느린 신흥 금융그룹으로 성장했다. 금융가의 신예세력으로 급부상하는 이 회장을 ‘제2의 박현주’라고 점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1954년 대유증권이라 이름으로 창립된 골든 브릿지 투자증권은 이 회장이 인수하기 전까지 5년 동안 적자를 냈지만 그가 인수한 이듬해부터 흑자로 돌아섰다.

또한 골든브릿지 자산운융의 전신인 뉴스테이트자산운용의 경우도 그가 인수할 당시 자본금 80%가 잠식당한 최하위 부실 금융기관이었다. 하지만 3년 만에 자본잠식을 해소하고 수탁자산을 1조원으로 끌어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 회장은 현재 국제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2010년까지 베트남에 제2의 본사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금융포트폴리오 확충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비나블루오션펀드 5000만 달러 공모에 성공하면서 베트남을 가장 잘 아는 금융그룹의 대명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 회장은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며 금융계의 무서운 핵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평범한 회사원에서
재계 20위 재벌총수로…STX 강덕수 회장

시골 태생, 비명문대학 출신, 평범한 회사원 그에게는 최고나 일류, 명문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

경북 선산출신, 동대문상고와 명지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73년 쌍용양회에 입사. 기획 금융 경영 등에서 20년 동안 평범한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STX 강덕수(57) 회장 이토록 평범했던 그는 현재 재계 20위권의 총수로 올라섰다.

강 회장은 지난 2000년 쌍용그룹 붕괴당시 쌍용중공업을 살리기 위해 뛰다가 생사가 불투명했던 회사에 사재를 넣고 CEO에 올라 지난해 매출 13조원, 경상이익 1조원, 수출액 100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에 STX를 자산규모 재계 24위, 매출규모 10위권 회사로 만들었다.

쌍용양회 사원에서 시작한 강 회장은 부도로 헤매던 기업을 인수해 7년 만에 거대한 중공업그룹을 일군 셈이다. 2001년 출범 이래 STX조선, STX에너지, STX팬오션 등 3개 회사를 인수하고 STX엔파코, STX중공업, (주)STX, STX건설, STX엔진 등 5개 회사를 설립했다.

또한 글로벌 경영에도 박차를 가해 지난해 중국 다롄(大連)에 조선소를 착공했고, 아제르바이잔에서 유전을 개발했으며, 노르웨이에 있는 크루즈선 전문 조선회사인 아커야즈를 인수했다. STX는 1970년대 경제개발 시대에도 보기 힘들 정도로 급성장하는 신흥재벌인 셈이다.

공격적인 기업 인수ㆍ합병(M&A)을 통해 회사 설립 7년여 만에 매출 8조원 규모인 국내 5대 중공업그룹으로 키운 M&A 귀재 강 회장.

회사를 다니면서 “한 번도 월급쟁이로 생각한 적이 없다”는 주인의식으로 무장한 강 회장은 시대가 만들어 샐러리맨 신화로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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