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그룹이 연말을 맞아 대규모 자금조달에 나서 눈길을 끈다. 지난해 11월 제일모직에 이어 약 한달 만인 12월 9일 호텔신라가 10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이뿐만 아니다. 삼성물산도 차입금 상환 등을 위해 지난해 말 3000억원 규모 채권을 찍어냈다. 삼성 채권발행은 2004년 8월 삼성전기 이후 처음이다. 이에 따라 재계 일각에선 “무풍지대로 여겨졌던 삼성그룹조차 최근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아니냐”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유동성 위기 논란에 휩싸인 삼성그룹의 현 상황을 짚어봤다.
증권시장에 좀처럼 보기 힘든 ‘물건’이 나왔다. 바로 삼성 비금융 계열사 채권이다.
지난해 11월 제일모직은 10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제일모직의 회사채 발행은 만기가 돌아온 1800억원 규모의 기업어음(CP) 상환을 위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약 한달 뒤인 12월 9일 호텔신라도 10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시장에 내놨다. 경기침체에 따른 선제적 자금 확보 차원에서였다.
금리도 웬만한 사채이자 뺨친다. 제일모직이 연 8.11%고, 호텔신라가 연 9.13%다. 이는 1999년 이후 10년래 나온 삼성 채권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다.
삼성 계열사들의 돈 모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삼성물산도 이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금융시장에 따르면 삼성물산은 연내 30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할 계획이다. 차입금 상환 등을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삼성물산이 회사채를 발행하는 것은 지난 2004년 12월 이후 처음이다.
삼성도 위기인가?
삼성의 유동성 위기설이 나도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삼성채권은 외환위기 직후 대우채 사태, SK글로벌 사태, 신용카드 사태 등 뚜렷한 위기상황에서 한 두 차례 등장했을 뿐이다. 정상적인 경제상황에선 좀처럼 보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실제 삼성그룹을 통틀어 채권발행은 2004년 8월 삼성전기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2008년 사정이 달라졌다. 먼저 그해 3월과 8월, 제일모직이 8000만 달러 규모의 달러표시 회사채를 발행했다. 하지만 모두 사모였고, 설비투자 자금이라는 점에서 재계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금리도 연 4% 안팎이었다.
하지만 11월 이상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이 공모시장에 고금리 채권을 내놓은 것이다.
이와 관련 재계의 한 관계자는 “무풍지대로 여겨졌던 삼성그룹조차 최근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아니겠느냐”며 “특히 채권을 발행한 두 회사는 이건희 전 삼성회장의 장녀 이부진 상무와 차녀 이서현 상무보가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곳”이라고 귀띔했다. 쉽게 말해 오너일가가 직접 운영하는 회사가 사채시장까지 나온 속내는 오죽했겠느냐는 얘기다.
딸 내세워 돈 모음
재계 관계자의 이 같은 발언은 호텔신라와 제일모직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이번 회사채 발행의 목적이 단기차입에 따른 한계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실제 제일모직은 11월 6일부터 12월 16일까지 돌아오는 1800억원의 만기 기업어음(CP) 상환에 돈을 쓸 예정이다. 자체자금이 800억원 가량 있지만 11월말 소진될 가능성이 높자 사채발행에 나선 것이다.
호텔신라의 사정은 더욱 안 좋다. 호텔신라는 이번에 모집한 돈을 오는 3월에 돌아올 만기회사채 400억원과 9월에 돌아올 만기 기업어음 807억원 가운데 595억원을 막는 데 쓸 예정이다.
3월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1년여 가까이 남은 회사채 만기를 벌써 준비한다는 부분은 쉽게 이해가 가질 않는다. 최대 수익원인 면세점이 이미 경기침체와 환율급등으로 인한 매출감소와 이로 인한 높은 임대료 부담을 겪고 있는데, 올해에는 더욱 어려워질 수도 있는 만큼 미리 대비한다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박지영 기자 pjy0925@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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