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유업의 유별난 손자사랑 논란
남양유업의 유별난 손자사랑 논란
  • 박지영 기자
  • 입력 2008-10-15 11:01
  • 승인 2008.10.15 11:01
  • 호수 755
  • 2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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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감원 전자공시자료 왜 몇 개월 후에 나왔나?
두 살배기 젖먹이가 수억원대 주식을 가진 최대주주로 ‘등극(?)’해 화제다. 남양유업 홍원식(58) 회장의 친손자인 홍윌리엄 군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2007년 4월 25일생인 윌리엄 군의 나이는 올해로 만 1세. 옹알이도 떼지 못한 윌리엄 군이 가진 남양유업의 보유 지분 가치는 무려 19억원이나 된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매달 적립식 펀드에 돈을 붓거나, 주식에 조금씩 투자하는 일반 부모로서는 허탈할 뿐이다. 남양유업 홍원식 회장의 유별난 손자사랑을 뒤쫓았다.

홍원식 회장 일가가 윌리엄 군에게 주식을 퍼주기 시작한 것은 올 2월 초. 금융감독원의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윌리엄 군은 지난 2월 1일 김정선 씨로부터 남양유업 보통주 1168주를 넘겨받았다.

당시 남양유업 보통주 종가는 81만3000원으로, 이날 윌리엄 군이 받은 주식의 총액은 9억4958만4000원에 달한다.


손자는 최연소 최대주주

윌리엄 군을 향한 홍 회장의 ‘주식 선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전자공시시스템 및 남양유업 측에 따르면 홍 회장은 윌리엄 군 생일을 일주일 앞둔 지난 4월 18일 남양유업 주식 1168주를 ‘선물’했다. 윌리엄 군 탄생 1주년을 맞이해 수억원대 생일선물을 준비한 셈이다.

이때 당시 남양유업 1주 값은 78만8000원으로, 이날 윌리엄 군이 받은 생일선물의 값어치는 9억2038만4000원 상당이다. 말 그대로 최고의 생일선물이 아닐 수 없다. 이로써 갓 걸음마를 익힌 윌리엄 군의 재산은 18억6996만8000원이 됐다.

그러나 홍 회장 일가의 손자에 대한 주식 증여는 곳곳에서 많은 의문점을 낳는다.

첫째론 처음 주식을 준 김정선 씨와 윌리엄 군과의 관계다. 업계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은 매우 복잡한 관계로 얽혀있다.

김정선 씨는 윌리엄 군의 증조할아버지인 홍두영 명예회장과 인연이 닿아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홍 명예회장 부인이자 윌리엄 군의 증조할머니인 지송죽 여사 쪽 인맥이다. 김정선 씨는 지 여사 남동생과 화촉을 밝혔다.

이번 주식 증여에 대한 의혹도 여기서 출발한다. 김정선 씨가 홍 명예회장에겐 처남댁이지만 윌리엄 군에겐 먼 친척뻘이기 때문이다. 더욱 엄밀히 따지자면 두 사람은 말이 좋아 친인척이지 사실상 ‘아무사이’도 아니다.

재계를 중심으로 ‘차명주식’설이 나도는 까닭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지난 2월 1일 김정선 씨가 윌리엄 군에게 준 남양유업1168주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주식 전부를 ‘몽땅’ 넘겨준 것이다.

두 번째 의문은 ‘마지막 증여가 왜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누락돼 있느냐’는 점이다.

실제 윌리엄 군이 주식 증여를 받은 4월 공시자료엔 ‘최대주주 등 소유주식 변동신고서’를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이 수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뒤늦게 알려진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손자 생일선물이 9억원 주식

이와 관련 남양유업 홍보팀 관계자는 “IR 홍보담당자가 해외출장 중이라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회장님께서 귀한 손을 보셔서 고마운 마음에 주식을 선물한 것으로 보인다. 또 아주 소액이기 때문에 금감원에 의무 공시할 사항도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논란의 여지는 남아있다. 지난 2월 김정선 씨에게 1차 증여를 받으면서 윌리엄 군은 남양유업의 최연소 최대주주로 등극했다. 이에 따라 윌리엄 군은 아무리 사소한 주식거래일 지라도 금융감독원에 보고해야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남양유업 측은 “증여세를 냈으니 문제될 게 없지 않느냐”며 오히려 큰 소리다.

실제 윌리엄 군은 지난 7월 31일 증여세 2억원 상당을 남양유업 보통주 276주로 물납했다. 이날 두 살짜리 윌리엄 군이 낸 세금은 1억9320만원이다.


#남양유업 홍두영 명예회장은 누구?

돌다리 보수경영 44년째 분유사업

1919년 1월 7일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면 서부동에서 태어난 홍두영 남양유업 명예회장은 유복한 가정에서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1944년 일본 와세다 제1고등학교와 와세다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홍 명예회장은 이후 고국으로 돌아와 잠시 교편을 잡았다. 교사생활을 하던 1947년 5월에는 열 살 아래인 지송죽씨와 결혼해 가정까지 꾸렸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예기치 않은 복병을 만나게 된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홍 명예회장을 김일성 정권이 곱지 않게 본 것이다. 이에 홍 명예회장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가족과 함께 월남을 결심하게 된다.

홍 명예회장의 첫 사업은 경험 부족 등으로 실패했다. 종전 이듬해인 1954년 부산에서 비료를 수입하는 ‘남양상사’를 일으켰지만 62년 화폐개혁이란 뜻밖의 복병을 만나 8년 만에 모든 재산을 날려버렸다.

일각에서는 당시의 충격이 너무 심해 ‘돌다리를 두드려보고도 건너지 않는’ 소심증이 생겼단 말도 한다.

첫 사업 실패 이후 홍 명예회장의 보수적 경영이 시작됐다. 홍 명예회장이 사업 재기를 꾀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분유였다. 1963년 선진 외국 출장길에서 분유사업을 눈여겨 봐뒀던 것이다.

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홍 명예회장은 64년 3월 13일 남양유업을 설립,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시켰다.

박지영 기자 pjy0925@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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