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항공사 선정기준 놓고 ‘설왕설래’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해 온 금호아시아나항공이 극심한 ‘성장통’에 시달리고 있다. 아시아나항공의 급격한 성장 도약은 그룹 숨통까지 옭매고 있는 실정이다. ‘민간항공기 사업권’을 따냈을 당시 겪었던 ‘전두환(DH) 정권 내통설’은 시작에 불과했다. 최근엔 아시아나항공의 최대 자랑거리인 ‘파이브 스타 항공(five star airline)’ 선정 기준에 대한 의문까지 겹쳐졌다. 이에 <일요서울>은 재계에서 제기되고 있는 파이브 스타 항공사 선정 기준에 대해 집중 취재했다.
운송사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금호그룹은 대표적인 호남계 재벌기업이다. 고 박인천 금호그룹 명예회장은 지난 1946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미국산 중고택시 2대로 ‘광주고속’이란 택시회사를 차렸다. 당시만 해도 광주고속(현 금호고속)은 일개 운수사업체에 불과했다.
그런 보잘 것 없는 소규모 회사가 대기업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에서 70년대쯤이다. 특히 전두환(DH) 정권 말기였던 87년 말엔 ‘제2 민간항공기 사업권’을 따내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약적 발전 뒤에는 언제나 극심한 ‘성장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만큼 뒷말도 무성했다. 국내 10대 기업에도 들지 못했던 금호그룹이 국내 굴지의 재벌그룹들을 모두 제치고 정부로부터 ‘항공운수사업권’을 따낸 것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사업권을 따낸 시기도 이에 대한 의혹을 부채질했다. 전두환 정부의 임기가 끝날 무렵인 1988월 2월 24일에 사업권을 승인 받았기 때문이다. 전두환 대통령의 퇴임은 1988년 2월 25일이었다.
시작은 좋은데 끝이 영
이렇듯 아시아나항공은 허가 당시부터 ‘특혜 의혹’에 휩싸이는 등 ‘출항’이 순조롭지 못했다. 시작부터 각종 우려와 비난·견제를 받아서였을까. 아시아나항공은 실력으로 승부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경쟁사인 대한항공 보다 신형 기종으로, 또 최상의 서비스를 지향하며 시장에 뿌리내렸다.
하지만 계획했던 대로 일이 쉽게 풀리진 않았다. 때만 되면 안전성 문제가 툭툭 불거졌다. ‘아마추어 항공사’란 오명을 쓰게 된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다.
이런 가운데 아시아나항공이 또 다시 TV광고로 구설에 올랐다. 아시아나항공은 최근 자사 TV광고에 “여행의 즐거움, 파이브 스타 서비스라면 기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세계 다섯 개뿐인 파이브 스타 항공사, 아시아나 항공”을 강조하고 있다. 아시아나항공이 세계 어떤 항공사보다 뛰어나다는 내용이다.
특히 아시아나항공은 지난 8월 13일 <아시아나항공, ‘2008 세계 항공사 대상’ 5개 부문 석권>이란 제하의 언론용 보도자료를 배포하기도 했다.
하지만 업계는 아시아나항공의 이 같은 광고 전략에 대해 한 마디로 ‘어이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업계 관계자들은 “파이브 스타 항공사 선정 기준이 모호하다”고 입을 모았다.
우선 파이브 스타 항공사는 1989년 설립된 항공산업전문 평가기관인 영국의 스카이 트랙스(SKY TRAX)사의 심사(Audit)를 통해 ‘별 하나부터 다섯 개’ 방식으로 항공사를 분류한다.
스카이 트랙스의 심사 기준에 따르면 별 다섯을 받은 ‘파이브 스타 항공사’는 최상급 서비스가 이뤄지고, ‘쓰리 스타 항공사’는 평균 수준의 서비스가 이뤄진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항공사든 스카이 트랙스 심사에 응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업계에 따르면 스카이 트랙스 심사에 참여한 기업은 약 1억원 상당의 자금이 든다. 세세 항목으로는 다음과 같다.
업계에 따르면 스카이 트랙스 심사비용은 참가비 2만달러 내외(한화 약 2000만원)를 비롯, 심사관이 사용할 퍼스트 항공권 6매, 비즈니스 항공권 8매, 이코노미 항공권 21매 등이다. 항공권만도 우리나라 돈으로 약 9800만원 상당이다. 항공권 매수는 심사기준에 따라 변동 가능하지만 이 많은 항공권을 공짜로 내준다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파이브 스타 항공사’로 선정된 아시아나항공의 경우 2년 연속 1억원 가량의 심사비용을 주고 타이틀을 유지했다는 소리다.
참가항공사 몇 안 돼
이뿐만 아니다. 스카이 트랙스의 심사기준도 문제가 되고 있다. 스카이 트랙스 홈페이지에 기재된 내용에 따르면 ‘2008년 파이브 스타 항공사’에 선정된 곳은 모두 6개사다. 아시아나항공을 비롯, 캐세이패시픽항공, 킹피셔항공, 말레이시아항공, 카타르항공, 싱가포르항공 등이 바로 스카이 트랙스가 뽑은 2008 파이브 스타 항공사다.
그러나 스카이 트랙스가 선정한 파이브 스타 항공사는 공교롭게도 각 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이 아니었다. 심사기준 논란이 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 캐나다의 에어캐나다항공이나 일본의 ANA항공, 호주의 콴타스항공, 프랑스의 에어프랑스항공은 올해 스카이 트랙스의 심사를 모두 거부했다.
특히 독일의 루프트한자항공, 미국의 유나이티드에어라인항공, 영국의 브리티쉬에어웨이항공사들은 처음부터 심사를 받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관련 국내에 취항한 유럽의 한 항공사 직원은 스카이 트랙스에서 선정하는 파이브 스타 항공사 기준이 자사 항공사에는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런 입장은 유럽과 북미의 유수의 항공사에서도 같은 견해를 보였다.
익명을 요구한 항공업계의 한 관계자는 스카이 트랙스의 심사기준에 대해 “항공기를 이용하는 승객들이 평가에 참여한 것도 아니고, 스카이 트랙스라는 사설 평가기관의 평가관이 임의의 평가기간을 정해서 공항과 기내 서비스만을 통해 항공사의 서비스를 평가하는 것은 신뢰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 또한 “스카이 트랙스사는 서비스만 평가하는데 항공사는 서비스만큼 승객의 안전과 항공기의 정시운항 등이 더욱 중요할 것”이라며 “실제 유럽을 포함한 외항사들은 스카이 트랙스의 심사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이런 점에서 유럽보다는 아시아권의 항공사들이 더 나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아시아나항공은 스카이트랙 하나의 평가만 가지고 ‘마케팅 도구’에 이용하는 것은 유럽에 본사를 둔 자사로써는 이해하기 힘들다”고 전했다.
“마케팅 도구일 뿐”
여기에 “스카이 트랙스의 ‘파이브 스타 항공사’ 타이틀은 마케팅 도구일 뿐”이란 얘기까지 나와 눈길을 끈다.
유럽 항공사의 한 관계자는 “매년 일정 수준(대략 1억원 정도)의 심사비용을 내는 아시아나항공이 한국에서 마케팅의 방법으로 쓰고 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된다”며 “이런 점에서 유럽 항공사들은 5스타항공사은 결국 ‘돈 주고 사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가진다”고 귀띔했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도 이들의 성토에 힘을 실었다.
IARA의 한 관계자는 “실제 외항사들의 서비스는 아시아권 특히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에 비해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여행업계나 항공업 관계자들조차 스카이 트랙스의 파이브 스타 항공 기준에 의구심을 가진다”고 말했다.
특히 이 관계자는 “스카이 트랙스에서 선정한 파이브 스타 항공사 중 인도의 킹피셔항공사의 경우 국제항공사가 아닌 인도의 국내 항공사가 선정된 것을 보도라도 형평성에 논란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하다”며 “심사기관인 스카이 트랙스는 사설 기관인 만큼 객관적인 수치도 아니고 공신력을 보여주는 데 한계가 있지 않냐”고 설명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 태동은 이렇게
금호그룹 출범은 독립된 우리나라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때 즈음 박인천 금호 창업주가 운수사업에 뛰어든 까닭이다.
당시 박 창업주는 수중에 있던 돈 17만원을 탈탈 털어 포드 디럭스 세단 5인승 택시 두 대를 사들였다. 그때 돈 17만원은 80kg짜리 쌀 44가마를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사업수완이 남달랐던 박 창업주는 2년여 짧은 기간에 어느 정도 자본을 축적, 1948년 광주여객을 세운 뒤 본격적으로 운수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박 창업주는 ‘운’이 좋지 못했다.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하지만 박 창업주는 온갖 역경 속에서도 광주여객을 전라남도 최대 여객운송업체로 키워냈다.
광주여객을 업계 최고 반열에 올려놓은 박 창업주는 이후 지금의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 기틀을 조금씩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1972년 어느 날이었다. 이날 박 창업주는 큰 아들 성용에게서 중대한 제안을 받는다. “경영성과를 높이고 효율적 운영을 위해선 지주회사 설립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받아들인 박 창업주는 그해 10월 10일 지주회사 ‘금호실업’을 설립했다. 지금의 금호아시아나그룹이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후 1973년 1월 1일 박 창업주는 금호의 초대 그룹회장으로 취임, 그룹체제 출범과 함께 계열사별로 경영관리체제를 정비했다. 그로부터 11년(1984년 6월) 뒤 박 창업주는 노환으로 세상을 등졌다.
박지영 기자 pjy0925@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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