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경영’의 대가 이건수 동아일렉콤 회장
‘사람경영’의 대가 이건수 동아일렉콤 회장
  • 박지영 기자
  • 입력 2008-06-26 16:56
  • 승인 2008.06.26 16:56
  • 호수 62
  • 2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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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수 동아일렉콤 회장은 미주 한인들 사이에서 ‘입지전적’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다.

이건수 회장은 항일 운동가인 부친 탓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1942년 중국 허베이성 스자장시에서 태어난 그는 중국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 그 당시 어머니가 옥고를 치렀던 까닭이다.

해방이 돼서도 이건수 회장 일가의 도피생활은 계속됐다. 해방 직후 신의주로 터전을 옮겼지만 이번엔 공산당에 쫓기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한 살 터울 동생이 얼어 죽기도 했다. 이후 ROTC로 군대를 마친 이건수 회장은 잠시 무역회사에 입사했으나 이내 실업자가 됐다. 20대 초반 때 일이다. 하지만 ROTC 때 겪었던 혹독한 군사훈련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건수 회장은 거의 무일푼이나 다름없는 단돈 100달러와 수제가발 100개를 들고 홀연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게 사업의 시작이었다.

사업은 쉽지 않았고, 영어는 어려웠다. 말로 잘 설득이 안 되자 다른 방법을 찾았다. 대신 행동으로 진실을 보여주기로 했다. 정직이 유일한 ‘크레디트’였다.

특유의 성실함으로 미주사회에서 인정받은 이건수 회장은 도미한지 6개월 만에 맨해튼 아메리카 애버뉴에 소규모 숍을 마련, ‘사업가’로의 발판을 마련한다. ‘박지원’ 씨와의 인연 또한 바로 이 무렵 맺어진 것이다. 이건수 회장이 돈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통신장비 유통업을 하면서부터. 이 무렵 중동에 원자재를 공급하는 무역업에 손을 댄 그는 2000만 달러에 달하는 부를 축적하게 된다.

그런 그가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 초·중반이다.

1986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이건수 회장은 당시 부도 직적이었던 동아일렉콤(구 동아전기)를 인수, 20년 만에 매출액 640억 당기순이익 30억 규모(2007년 기준)의 중견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정부가 진행하는 통신시스템 개발 사업에 뛰어들었고, 국가 통신망 확충사업에 큰 기여를 했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정부의 핵심 실세와 돈독한 친분관계를 쌓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건수 회장은 또 오명 전 과학기술부총리, 양승택 전 정보통신부 장관 등 대한민국 정보통신을 이끈 사람들과도 매우 가깝다. 한번 맺은 인연을 끌고 나가는 ‘사람경영’이 탁월하다는 게 주변인들의 전언이다.

한편 17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인수위원장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이건수 회장은 알려진 대로 윤현진 아나운서의 시아버지이기도 하다. 윤현진 아나운서는 지난 5월 10일 이건수 회장의 외아들인 브라이언 이씨(30)와 결혼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브라이언 이씨는 하버드 웨스트레이크에서 명문 사립 중·고등학교를 마쳤고, 경영학에서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펜실베니아 와튼 스쿨을 졸업한 엘리트로 알려졌다.

박지영 기자 pjy0925@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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