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이상한 사장

재계에 ‘별일’이 다 생겼다. 경쟁업체로서 수년간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두 재벌그룹이 돌연 그간의 악감정을 뒤로한 채 극적으로 화해했다. 여기에 더해 이제는 합작사까지 만들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있는 상황이다. 대기업 합병이란 ‘깜짝 카드’로 재계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은 곳은 다름 아닌 SK와 코오롱그룹.
폴리이미드(PI) 필름이란 전자소재 분야에서 다년간 경쟁해 온 두 기업은 지난 4월 30일 합작사 설립에 정식으로 합의하고 계약서에 사인했다. 그러나 이들의 ‘괴짜’ 언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고경영자(CEO)를 뽑는 자리에서도 계속됐다. ‘대표이사 사장을 어느 쪽이 맡느냐’는 중요한 기로에서 ‘사다리타기’ 게임으로 대표이사를 결정한 것이다.
지난 4월 30일 경제계에선 의미 있는 일이 있었다. 섬유업계의 오랜 맞수였던 SK그룹과 코오롱그룹이 각각 PI필름 사업부를 분사해 합작법인을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PI필름은 내열성과 내구성이 뛰어나 그동안 휴대전화 및 평판디스플레이(PDP) 등의 핵심부품으로 사용돼 왔다. 나아가 자동차·전자분야까지 확대되면서 PI필름 시장은 매년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타도 일본” 잘 될까?
하지만 몇몇 일본 업체가 세계 PI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한 상황에서 코오롱과 SKC(SK그룹 화학섬유 계열사)가 뒤늦게 뛰어들어 이들을 독자적으로 상대하긴 애초부터 무리였다. 양사의 개별적 생산능력은 미국과 일본 기업의 40%에도 못 미치는 미비한 수준이었다.
결국 SKC와 코오롱은 ‘라이벌’ 관계를 떠나 지난해 말 ‘윈윈’ 관계로의 전략을 꾀했다. 두 국내 기업이 힘을 합쳐 세계 PI필름시장을 독식하고 있는 미국과 일본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두 대기업의 자발적 합작사 설립은 매우 드문 사례. 해외 글로벌기업 간 전략적 제휴나 국내 대기업과 외국기업 간 합작은 많이 있었지만 국내 대기업 간 ‘자발적 합치기’는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2000년 삼양사와 SK케미칼이 폴리에스테르 사업부문을 합쳐 ‘휴비스’란 회사를 설립한 이후 민간 자율의 기업통합으로는 처음이다.
이 외엔 과거 군사정권 때나 외환위기 직후 이뤄졌던 정부에 의한 반강제적 합병 정도다.
SKC와 코오롱 간 합작법인 설립 건이 처음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말. SKC 박장석 사장과 코오롱 배영호 사장이 먼저 만나 의견을 조율한 뒤 각자 그룹 회장에게 보고하면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특히 이번 프로젝트는 SK 최태원(48)회장과 코오롱 이웅열(52)회장 간의 ‘우정’이 큰 발판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같은 내용을 보고받은 최태원 회장은 “한번 해보라”며 흔쾌히 허락했고, 이웅열 회장도 “그래, 이러면 되겠네”라며 무릎을 ‘탁’ 쳤다고 한다. 두 총수는 신일고 선후배 사이로 평소에도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이 최 회장의 4년 선배다.
여기에 같은 고려대 출신인 두 사람은 재벌 2·3세 모임인 ‘브이소사이어티’ 회원이기도 하다. 재계 관계자에 따르면 최 회장과 이 회장은 지난해 연말 모임 등에서 만나 자연스럽게 의견을 교환하면서 협상을 급진전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기업 총수가 ‘호형호제’하는 사이일지라도 멀쩡한 대기업이 50%씩 똑같은 지분을 나눠 갖고 각자의 기존 사업체를 합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코오롱-SK 회장 고교 선후배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된 것은 “누구를 대표이사 사장에 등재시킬 것”이냐는 점이었다. 의사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표이사 사장을 어느 쪽 기업의 누가 맡기느냐에 양사 직원들의 관심이 증폭된 것.
하지만 이 또한 SKC와 코오롱에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기업은 어려운 문제의 해답을 이외로 단순한 데서 찾았다.
업계에 따르면 대표이사 선임을 두고 SKC 박장석 사장과 코오롱 배영호 사장은 학창시절에나 했을 법한 ‘사다리타기’를 했다고 한다. 이 단순한 ‘절차’로 코오롱 측이 초대 대표이사 사장을 맡게 됐다는 것. SKC 측에서도 아무런 이의제기가 없었다고 한다.
박지영 기자 pjy0925@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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