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저격수’ 당락 따라 희비교차 천차만별

4·9 총선 결과에 따라 대기업들의 명암이 엇갈리고 있다. 일명 ‘재벌 저격수’로 불리는 특정후보의 당락에 따라 이해관계에 얽힌 프로젝트를 짜는데 여력이 없다. 18대 총선이 끝난 지난 9일 늦은 시간, 재계는 실시간으로 방송된 총선 개표현황에 따라 가벼운 한숨과 환호를 번갈아 내질렀다.
18대 국회의원 당선 여부에 따른 재계의 기상도를 살펴봤다.
현대중공업, 정몽준 당선에 ‘맑음’
현대중공업과 범현대가는 정몽준 의원의 서울 동작을 승리에 잔칫집 분위기다.
당선여부가 기업 경영에 직접적 영향을 주진 않지만 기대요소 등 간접적으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배경에서다. 실제 범현대가 일원들 대부분이 정 의원 당선 소식에 직접 축하 전화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이라고 마냥 좋은 것만 아니다. 막대한 현금을 무기로 M&A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마당에 대주주인 정 의원의 위상이 커질수록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식 절차를 밟아서 기업사냥에 나서더라도 주변의 시각이 곱지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현대, 시동생 정몽준 당선에 ‘흐림’
반면 정 의원의 당선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에겐 위기로 다가왔다.
현대가 적통을 둘러싼 물밑싸움이 거센 상황에서 정 의원의 당선이 달가울 리 없다. 특히 향후 현대건설 M&A는 물론 현대상선에 대한 적대적 M&A까지 염두에 둘 경우 정 의원의 존재는 그야말로 암초와도 같다.
그중에서도 그룹 입장에선 현 회장과 정 의원 간의 기 싸움이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두 사람의 신경전은 때와 장소를 따로 가리지 않는다. 지난 3월 20일 열린 정주영 회장 7주기 때도 두 사람은 어김없이 서로를 보며 으르렁 댔다.
신경전 포문은 현 회장이 열었다.
이날 ‘왕 회장’ 추모식에 참석한 현 회장은 “현대가의 정통성은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에 있다”고 작심한 듯 말했다. 현 회장이 처음으로 정몽구 회장을 ‘어른’으로 공식 언급한 것이다.
적자에 대한 욕심이 남다른 정 의원이 이 같은 현 회장의 언급을 가만 두고 볼 리 만무하다.
정 의원은 “가족 앞에서 왜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며 불쾌한 감정을 입장에선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현 회장 자체를 무시한 태도다.
현대·기아차, 동생 당선에도 ‘묵묵’
정 의원의 큰형인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은 동생의 당선이 좋지도 싫지도 않은 상황이다.
그동안 정치와는 선을 그었던 정 회장은 동생 정 의원의 당선에 대해 이렇다 할 논평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동생의 당선을 통해 범현대가 재집결의 구심점 및 탄력까지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 저격수 2명 낙선 ‘흐렸다 갬’
삼성그룹은 이번 총선결과로 한시름을 놓게 됐다. 17대 국회에서 꾸준히 삼성을 공격해 왔던 진보신당 노회찬 의원과 심상정 의원이 줄줄이 낙선
한 까닭이다.
서울 노원병 후보로 나선 노회찬 진보신당 후보는 홍정욱 한나라당 후보에게 3% 차이로 밀려 아쉽게 떨어졌다. 이로써 삼성은 ‘걱정거리’ 하나를 덜었다. ‘삼성 저격수’ 하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로써 노 의원은 18대 총선에서 쓰디쓴 고배를 마심과 동시에 앞으로 삼성의 일에 왈가왈부할 처지가 아니게 됐다.
심상정 후보의 낙선 역시 삼성에 있어 나쁘지 않은 소식이다.
심 후보는 연설 과정에서도 “여러분 저 아세요? 어제 KBS 9시뉴스에도 나왔는데…. 이건희·재용 고발한 사람입니다. 삼성이 저한테 뿔 달렸다고 하는데”라며 삼성 저격수임을 끊임없이 강조해 왔다.
그러나 또 다른 저격수인 박영선 통합민주당 의원은 재선에 성공, 삼성에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MBC 기자 출신인 박 의원은 17대 국회 동안 에버랜드와 삼성생명 지분 문제 등 삼성의 아킬레스건을 공격한 바 있다.
이번 총선기간에도 박 의원은 “재벌이 은행을 소유하고 삼성생명이 에버랜드와 삼성전자를 자회사로 둘 수 있도록 할 경우 기형적인 재벌의 소유구조를 합법화해주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라며 삼성 심장부에 칼끝을 겨눴다.
한화, 엎친데 덮쳐 ‘비온 뒤 우박’
4·9 총선 이후 한화그룹의 표정은 밝지 않다. MB(이명박 대통령 영문이니셜)의 경제정책 브레인 중 한 사람으로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까지 역임한 이종구 의원이 강남에서 압도적인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의원은 국정감사 등에서 줄곧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는 원천무효”라고 주장해온 인물이다.
이 의원의 공세 속에 예금보험공사는 지난 2006년 국제상사중재위원회에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계약 무효 또는 취소 등을 요구하는 중재를 신청했으며 한화도 이에 맞중재를 신청해놓은 상태다.
중재 결과는 오는 6~7월께 나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한화의 그늘진 표정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친동생인 김호연 전 빙그레 회장이 천안지역 후보로 나섰다가 보기 좋게 패했기 때문이다.
한편 재벌기업들은 총선결과에 따라 겉으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있다. 자칫 수혜기업으로 분류돼 역차별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이유다.
재계 한 관계자는 “정치권과 재계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며 “직간접적으로 기업경영에 영향을 주지는 않겠지만 해당 기업들에게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박지영 기자 pjy0925@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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