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자 요청대로 유권자 착시유발

박빙의 승부를 펼치는 총선 후보들은 여론조사 결과가 나올 때마다 가슴을 졸인다. 여론조사마다 지지율 수치가 크게 차이가 나고 순위가 바뀌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6일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이후 방송과 신문 등은 하루도 빠짐없이 주요 지역구별 지지율 여론조사 결과를 쏟아내며 당선 유력 후보들을 양산하고 있다. 선거철 호황을 누리는 2000억 대 시장인 여론조사의 신뢰도와 정확성에서 상당히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참고 자료에 불과한 여론조사가 마치 표심인양 인식되는 바람에 유권자들의 판단을 흐리고 표심을 뒤흔드는 실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특히 최근 각종 언론매체와 조사기관이 쏟아내는 여론조사들은 최소한의 객관성을 보장하기 힘들다는 지적을 받는다.
상대후보와 표차가 현격이 나는 후보라면 모를까. 여론조사에 신경 쓰지 않고 정책선거로 표심이나 잡을 수 있는 후보는 몇 안 될 것이다. 표심이 여론조사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이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처지다.
접전지역 한 후보는 “표심이 급변할 수도 있다 손 치더라도 여론조사가 기관에 따라 틀리고 너무 중구난방”이라며 “표심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시민들은 여론조사 결과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검찰고발된 노원병 여론조사
이런 여론조사의 폐해가 실제 송사로 비화되기도 했다.
서울 노원병 지역구의 경우 3월20일자 한 곳과 3월27일자 두 언론사의 조사에서 노회찬 진보신당 후보가 홍정욱 한나라당 후보를 오차범위 이내에서 근소하게 리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27일자 한 보도에선 홍 후보가 노 후보에 12% 포인트 차로 넉넉히 앞서, 추세와 동떨어진 조사결과가 나와 노 후보를 아연실색케 했다.
지난 1일 진보신당이 여론조사 왜곡·조작 의혹을 제기하면서 헤럴드경제와 해당 여론조사 기관을 검찰에 고발했다. 이유는 “앞서 다른 언론의 5차례 조사에선 노회찬 후보(서울 노원 병)가 우세였는데 유독 출마 직전까지 홍정욱 후보가 회장이던 헤럴드경제만 홍 후보가 큰 차이로 앞섰다고 보도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현상은 왜 발생하는 것인가. 여론조사기관들은 가정집 전화를 이용해 대략 한 선거구당 500명에서 1000명 정도를 조사한다.
조사 대상은 해당지역의 성별, 연령별, 지역별 비율을 반영해 선정(할당표집방식)한다. 이 때 조사 샘플 수가 많을수록 정확도는 높아진다. 그러나 아무리 정확한 조사라도 오차가 있기 마련이다.
500명을 조사할 경우 오차범위는 대략 ±4.5% 정도인데, 이는 정확도의 차이가 최대 9%까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론 조사 모집단의 수가 워낙 적다보니 몇 명의 답변만으로도 지지도 순위가 뒤바뀔 수 있는 것도 문제다.
현재 우리나라 조사의 경우 응답률은 20% 안팎에 그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응답률이 30% 이하일 땐 신뢰도에 문제가 있다고 자체 판단해 조사결과를 발표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 한 여론 조사기관 관계자는 “미국은 비할당표집 방식을 이용하지만 우리나라는 연령, 성별, 지역별로 샘플을 선정(할당표집방식)하기 때문에 응답률 오차에 영향을 적게 미친다”고 설명했다.
조사 시간대도 변수다. 조사시간이 낮 시간대에 집중될 경우 집에 있는 대상만 조사하는 ‘표집성’의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여론조사간 차이가 나는 것은 샘플 수와 조사시간대의 오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며 “선거철에는 조사 의뢰가 폭주해 충분한 노하우와 자료가 축적되지 않은 기관의 경우 오차가 크게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질문지의 내용, 면접원 숙련 정도, 응답률에 따라서도 지지율이 변할 수 있다.
여론조사 방식 문제점 수두룩
그런데도 상당수 언론기관들은 후보 사이에 불과 몇 % 차이가 나는 경합지역을 위주로 여론조사 결과를 쏟아내고 있어 유권자들의 관심을 유력 후보에게만 묶어 두어 승자편중 현상을 가져오게 된다.
경합지역 위주의 보도로 인해 착시 현상이 나오는 것도 문제다. 실제 여론조사는 100 여 군데 경합예상 지역만 선별해 분석할 뿐 나머지 지역은 아예 여론조사에서 제외시킨다. 하지만 여론조사 보도는 경합지역만 부각시키다 보니 마치 전체 판세가 경합 중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오게 된다.
# 가장 큰 피해자는 군소정당
통합민주당 손학규 대표 측은 2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여론조사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중앙일보가 2일자로 보도한 서울 종로 조사 결과는 “손 대표가 후보로 확정되기도 전인 지난달 21일의 조사”라는 것이었다.
손 대표 측은 “특정 후보에게 매우 불공평한 결과가 보도됐으며, 유권자에게도 심각한 혼란을 가중시켰다”면서 해명기사를 요구했다.
서울 은평을에서 고전 중인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 측도 보도자료를 이 같은 문제를 제기한 뒤, “총선은 지역구가 좁아 상황이 급변하는데 10일 전 자료로는 현장 분위기를 알 수 없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특히 이 같은 경합지·유력후보 중심의 섣부른 여론조사 피해는 소수당일수록 크다. 민주노동당 엄윤섭 후보(서울 관악을)는 “신문·방송이 거대 양당 후보들의 지지율은 공표하지만 소수 정당은 아예 배제해 문제가 심각하다”고 했다.
이 밖에 여론조사를 통해 유력후보로 분류되지 못하는 군소후보 지지층은 아예 투표를 포기하거나 지지후보를 바꾸게 되는 점도 문제다. 부정확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 보도는 결국 정책 검증 없는 인기몰이 투표를 부추기며 실제 표심을 심각하게 왜곡시킬 우려가 높다.
김종훈 기자 fun@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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