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운 가를 최대암초는‘산업은행 민영화’

‘기업은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철학을 갖고 24살 학생신분으로 기업을 일으킨 동부그룹 김준기 회장. 김 회장은 몇 남지 않은 창업 1세대다. 지난 40년 간 경영일선에 몸담아 동부를 재계 순위 20위권으로 성장시킨 자수성가형 CEO다. 대외적인 활동도 거의 하지 않아 다른 회장들에 비해 알려진 것들이 없다. 신중한 김 회장이 지난달 10일 LG그룹 하정임 여사의 빈소에서 “CEO 더 할 생각이 없다. 40년 정도 했으면 많이 했지 않느냐 이제 은퇴해야지”라고 말을 하면서 온갖 추측들이 난무했다. 하지만 동부측은 경영상의 어려움을 털어놓은 가벼운 농담이라며 즉각 발언을 수습했다. 그러나 김 회장의 이러한 발언은 동부의 위기를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이를 뒷받침할 만한 경영 악화 근거들이 포착되고 있다. 말 속에 뼈가 있다는 것이다. 동부그룹 전체에 적색경계주의보가 발령중이다. 말 많고 탈 많은 동부. 최근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지난달 10일 김 회장의 발언은 상당히 위험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속담이 어울렸기 때문이다. 최근 동부가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가운데 김 회장의 CEO 은퇴발언은 단순히 하소연을 넘기기에는 설명이 부족했다.
은퇴발언 바로 다음 날 동부는 김 회장 소유인 1034억 원 규모의 동부화재 보유주식 200만주를 동부 하이텍에 빌려준다고 공시했기 때문이다.
김준기 회장 동부화재 주식 대여 후폭풍
그러나 재계에서는 의아하다는 반응이 터져 나왔다. 운영자금을 조달하려면 김 회장이 보유한 동부 계열사 주식을 팔아 동부 하이텍 유상증자에 참여하거나 동부 하이텍의 자산을 담보로 자금을 빌려도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경영이 악화됐다 하더라도 금융권에서 돈을 빌려오지 않고 회장의 주머니를 직접 털어준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또 김 회장이 내놓은 동부화재 주식은 동부그룹의 가장 알짜배기 주식이기 때문이다. 이에 재계에서는 동부 하이텍이 은행이나 금융권의 자금을 차입하기에는 신용도가 낮아 그룹 대주주의 지분을 싸게 차입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동부 하이텍이 재무적인 어려
움에 놓인 것을 반증이기도 하다. 실제로 동부 하이텍은 지난해 12월 28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소재 부동산을 동부화재에 299억 원에 매각한다고 공시했다.
계열사에 부동산을 팔아넘김으로써 현금유동성을 확보한 것이다. 또 보유 중이던 동부화재 보유 지분 341만 1680주를 1600억 원
에 전량 매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부 하이텍의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다. 주력사업인 반도체 부문의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동부 하이텍은 충북 음성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가공생산)공장을 세운 데 이어 2003년에는 아남반도체를 인수해 반도체 부문에 적극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비메모리반도체시장은 국내에서도 낯선 것으로 시장 진입 초기라 낮은 기술력과 경쟁력 없는 제품 양산으로 수익률이 매년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사업에 관심이 많은 기업인들조차 동부 하이텍의 주력상품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기업의 주력사업이
농업부문의 흑자로 겨우 연명되고 있는 상황이다.
김 회장의 40년의 꿈이라고 불리는 일관제철공장도 우려를 사고 있다. 공장이 완공되면 냉연강판 분야의 동부제강에 힘을 실어주게 될 예정이지만 동부제강의 실적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동부제강의 주력인 냉연강판, 음료수 캔, 자동차, 전기제품 외관에 TM이라는 냉연강판은 중국, 인도 업체들의 잇따른 생산으로 공급과잉을 빚은 데 반해 수요처리라 할 수 있는 백색가전, 자동차 부문 수요 국제 경기 둔화 등으로 위축돼 수익성이 악화 됐다. 이에 영업이익이 지속됐던 흑자는 2006년 적자로 돌아섰다.
따라서 일관제철공장 건설 전에는 포스코는 물론 해외 업체 매각설이 돌기도 했다. 일관체절의 완공과 함께 날개를 달아야 하는 동부제강의 수익성 악화는 우려할만한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동부그룹의 가장 큰 위기는 바로 내부가 아닌 외부적인 영향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 금융권에서는 산업은행 민영화에 따라 동부그룹의 유동성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산업은행이 완전 민영화되지 않고 기업금융 부문만 별도 분리돼 민영화되더라도 동부그룹에게는 치명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경영권승계 탈세의혹 비난 일어
시중은행은 동부그룹과 거래를 거의 중단해 산업은행이 동부 그룹의 자금줄이나 마찬가지지만 산업은행의 기업금융 부문이 정부의 입김을 받지 않고 자율화 된다면 동부 그룹의 유동성은 급격히 악화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는 동부 그룹 계열사들은 실적 악화에 따른 신용등급 하락으로 지난해에도 일부 상환을 조건으로 만기연장을 하는 등 회사채 발행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자산을 담보로 산업은행으로부터 자금조달을 받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설사 기대를 걸고 있는 동부 생명이 상장을 하게 된다면 일시적인 자금문제에 숨통이 트일 일 수 있지만 동부 제강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는데다가 상장 혜택이 일부 금융계열사에만 집중돼, 반도체 등 실적이 악화되고 있는 계열사들의 유동성 문제 해결에는
힘겨울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후계구도와 관련 증여세를 줄이는 방법으로 문화재단을 이용했다는 윤리적인 비난까지 받고 있다.
지난해 11월 김 회장이 가진 동부 CNI 지분 36.24% 중 11%를 외아들 남호에게 증여했으며, 딸 주원에게도 지분 2.26%를 넘겨 지분을 각각 16.68%, 10.27%로 높였다. 재계에서는 남호의 증여가 후계구도와 관련이 깊다는 것이 지배적인 시각이다.
이에 남호씨는 동부화재 15%, 동부 CNI 16.68%, 동부정밀화학 24.41% 등 동부 그룹 주요 계열사 지분을 갖게 됐다.
또한 남호씨, 동부화재, 동부건설, 합병법인 동부한농으로 이어지는 형태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동부문화재단에 증여한 동부 CNI의 지분 4.99%에 대한 비난이 일고 있다. 현재 공익법인에 현물 등의 출연을 할 경우 지식 상한선 5%까지 증여세를 면제
해준다는 것을 적극 활용한 것이다.
지주회사 밑그림 구상 위기 탈출
이에 문화재단을 이용해 증여세를 줄여 그룹의 지배권을 넘겨줬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그러나 동부 그룹의 희망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동부는 ‘제조-서비스-금융’의 3대 핵심사업을 축으로 한 계열사별 사업 재정리를 가속화하고, 지분 매각과 상장을 통한 투자 현금을 확보해 제철과 반도체 등 주력사업의 경쟁력 확보에 들어갔다.
사업 비중은 크지 않지만 철구사업과 광고. 컨설팅 사업을 하는 ㈜동부에도 기대를 걸고 있다. 다리의 강교량(鋼橋梁) 구조물을 생산하는 철구사업은 업종 연관관계가 큰 동부건설과 합병해 사업 역량을 키운다는 복안이다.
이는 차기 정부의 대운하 사업과도 맞물린다. 동부는 광고사업과 올 3월 오픈하는 충북 음성의 ‘레인보우힐스골프장’(동부월드) 등을 기반으로 레저문화사업 쪽으로까지 펼쳐갈 계획이다.
제철과 반도체를 종합제철과 종합반도체회사로 키워가는 한편 동부화재를 중심으로 한 지주회사체제 개편(금융)을 위한 밑그림 작업을 하고 있다. 미래지향적인 그룹의 틀을 완성해 성과를 내자는 게 목표다.
더불어 친 기업성향의 대통령인 이명박 당선자도 기업인들에게는 반가운 일지만 특히 김 회장은 고소영이라 불리는 고려대학교, 소망교회, 영남이라는 코드 중 가장 핵심인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출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융권과 재계에서는 동부의 유동성 위기에 대한 위기설이 끊이지 않고 있다. 동부는 과연 이런 각종 의혹들을 이겨내고 굳건히 재계 20위를 이어갈 수 있을까.
마지막 경영 1세대라 불리는 김 회장. 그의 역량이 진정으로 빛을 발할 때가 찾아왔다.
백은영 기자 aboutp@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