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현대 맨들’ 다시 뭉치나

‘이명박(MB) 정부 시대’를 맞아 범 현대가(家)의 행보가 심상찮다. 보란 듯이 드러내놓고 그들끼리 똘똘 뭉치는 모습이다. 최근 고 정주영 회장의 매제인 김영주 한국프랜지공업 명예회장 미수연 땐 범 현대가 가족 300여명이 대거 참석하기도 했다. 또 ‘옛 현대그룹 계열사가 M&A(인수·합병)시장에 나왔다’는 소문이라도 돌라치면 무조건 입찰에 응하고 있다. 특히 최근엔 현대그룹 상징인 ‘현대(現代) 머릿돌’을 제자리에 원상복구하기도 했다. ‘왕자의 난’ 때 떼어놓은 머릿돌을 수년 만에 도로 갖다 붙여 놓은 것이다. 범 현대가의 수상쩍은 최근 행보를 쫓아가봤다.
지난달 18일 김영주 한국프랜지공업 명예회장 미수연 행사가 열린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엔 범 현대가 가족 300여명이 모여들었다.
김 명예회장은 다름 아닌 ‘왕 회장’의 매제다.
‘OB 현대 출신’도 참석
이날 자리를 함께 한 현대가 사람들은 쟁쟁했다. 정상영 KCC 명예회장을 비롯, 정몽준 의원(한나라당 최고위원),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정의선 기아차 사장 등이다.
또 박세용 전 현대상선 회장, 김윤규 전 현대아산 부회장, 심현영 전 현대건설 사장 등 현대 일가친척은 물론 현대출신 OB들도 얼굴을 내밀었다.
행사를 지켜본 한 참석자는 “마치 옛 현대그룹이 복원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김(영주) 명예회장 감사말씀에 이어 고 정주영 회장의 생전모습과 육성을 담은 영상물이 나올 땐 참석 일가친척 모두 뭉클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도 잠시뿐이었다. 왕 회장의 생전모습에 이어 ‘현대맨’의 상징인 이명박 당선인의 축하메시지가 소개되자 행사장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 당선인이 직접 보내온 이날 영상엔 MB와 현대가의 각별한 인연이 구구절절 술회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 때문인지 재계일각에선 ‘정씨 일가가 옛 현대명성을 되찾기 위한 걸음을 본격화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하고 있다.
특히 이명박 전 현대건설 사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런 관측들은 더욱 무게를 실고 있다. 한라그룹이 범 현대가와 공동으로 만도를 인수한 게 그 시발점이란 분석이다.
이번 인수전과 관련, 그룹의 한 고위관계자는 “같은 항렬의 사촌인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 간 협력논의가 있었다. 외국계 사모펀드의 인수설이 떠오르자 현대가에서 1~2주 전부터 인수를 서둘러 결론짓게 됐다”고 귀띔했다.
이에 앞서 현대중공업이 대한통운인수전에 전격 참여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비록 M&A엔 실패했지만 인수전 참여를 통해 현대중공업이 제대로 된 ‘M&A연습’을 했다는 시각이다.
만도 인수가 범 현대가 재건의 시발점이라면 그 끝은 하이닉스반도체와 현대건설 인수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규모와 상징성 면에서 두 회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M&A시장에선 현대건설과 하이닉스의 유력한 인수후보로 현대중공업을 꼽고 있다.
머릿돌 뗐다 붙인 사연
이 밖에도 옛 현대그룹 상징인 서울 종로구 계동사옥 앞 머릿돌도 5년 만에 원위치로 돌아와 눈길을 끈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은 올 초 서울 계동 옛 현대그룹사옥에 ‘현대(現代)’라고 새겨진 대형 머릿돌을 원상 복구했다.
가로 2.5m, 세로 1.8m의 이 머릿돌은 현대그룹 계동사옥이 준공된 1983년 5월 입구 왼쪽에 설치된 뒤 현대가의 상징물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하지만 2002년 현대·기아차가 현대건설로부터 사옥을 사들이면서 정몽구 회장지시로 자취를 감췄다. 이는 계열분리에 대한 정 회장의 강한의지를 뜻하는 일로 여겨졌다.
최근까지 그 자리엔 건물주인과 거리가 먼 ‘해양수산부’란 글자를 새긴 머릿돌이 붙어 있다.
그러나 최근 이 머릿돌이 돌아왔다. 사옥 내 창고에 보관돼 있던 것을 도로 꺼내 놓은 주체는 현대중공업인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일각에선 현대중공업이 옛 현대명성을 재건하려는 의지를 나타낸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심지어 일부 재계 호사가들은 이명박 당선인 집권과 머릿돌 원상복구 배경을 연결시키기도 했다.
한나라당에 입당한 정몽준 의원(현대중공업 대주주)의 뜻이 반영돼 설치됐다는 게 주된 골자다. 이 머릿돌엔 공교롭게도 현대그룹의 발자취를 포함, ‘1977. 1 이명박 사장 취임’이라고 대통령당선인의 현대건설 사장 취임기록 등이 자세히 새겨져 있다.
범 현대가 명성 굳히기 올인
재계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를 종합해 보면 ‘명가 재건’ 의지가 가장 강한 사람은 ‘왕 회장’의 친동생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과 정몽구 회장, 정몽준 의원 등 3명이다.
그러나 현대중공업 쪽은 이를 전면 부인했다. 이와 관련된 현대중공업의 공식입장은 ‘검토한 바 없다’로 요약된다.
현대중공업 고위관계자는 “우린 머릿돌 재설치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며 항간에 일고 있는 잘못된 시각에 대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대·기아차그룹 관계자 또한 “최근 범 현대 오너일가에서 표지석을 원래대로 다시 붙이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온 것으로 안다”면서도 “시기가 애매한 점은 인정하나 표지석 설치와 이 당선인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반박했다.
계동사옥엔 현대그룹 계열사로 현대아산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나머지는 현대·기아차 영업본부, 현대중공업, 해양수산부, 국가청렴위원회 등이 쓰고 있다.
박지영 기자 pjy0925@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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