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발칵 뒤집혔다. 이 일로 삼성 전략기획실(옛 구조조정본부) 최고 권력자인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은 한밤중에 복에도 없는 ‘뻗치기’(어느 한 지점에서 중요 인물을 기다리는 행위를 가리키는 기자들의 은어)를 하기도 했다. 또 전략기획실은 중국으로 유학간 임원마저 불러들여 24시간 밤·낮 없이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러한 진풍경을 연출하게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김용철(49·사시 25회) 전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 삼성의 관제탑이라 불리는 구조조정본부에서 7년간 재무와 법무를 일임한 그가 삼성의 내부비리에 대해 입을 열었다. 삼성그룹 비자금 폭로 이후 두문불출했던 그가 지난 11월 5일 드디어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용철 전 삼성 법무팀장의 양심고백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지난 11월 5일,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성당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날 오후 2시부터 이곳 50주년 기념관 1층 시청각실에서 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의 2차 양심고백이 진행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이 열릴 시청각실은 오전 11시부터 100여명의 취재진들이 모여 발디딜 틈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미처 회견장에 입장하지 못한 수십명의 기자들은 회견이 끝날 때까지 밖에서 추위와 싸워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양심고백 기자회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은 “2차 양심고백 때 삼성 비자금 조성 과정과 일부 ‘떡값’ 검사의 명단을 공개 하겠다”고 천명했었다.
현재까지 김 변호사가 폭로한 삼성 관련 비리 의혹은 ▲임원 명의 차명계좌를 통한 벌법 비자금 조성과 ▲이건희 회장의 로비지시 문건 ▲에버랜드 재판부에 30억 로비 및 증인조작 ▲불법 뇌물 받은 검사 명단 ▲삼성의 거액 회유 시도 ▲이건희 회장 아들인 이재용 전무의 재산형성 과정에서의 불법행위 등이다.
“차명계좌가 승진의 징표”
“삼성을 위해 검찰이 움직이고, 국정원이 움직이고, 청와대가 움직이고, 모든 언론 기관이 움직이며 실시간 정보보고를 했다. 심지어 삼성에 가장 비판적인 시민단체마저 회의가 끝나자마자 회의록을 삼성에 보냈다.”
지난 10월 29일 사제단의 1차 양심고백 기자회견 이후 1주일 만에 이뤄진 2차 양심고백 기자회견에서 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이 한 말이다. 2시간가량 계속된 기자회견에서 김 전 법무팀장은 수시로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삼성의 불법 로비자금을 받은 검사들의 명단과 이건희 회장 아들인 이재용 전무의 재산형성 과정은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김 전 법무팀장은 기존에 알려진 사실에 덧붙여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털어놨다.
첫째는 현직에 있는 최고위급 검사 가운데 삼성의 불법 뇌물을 정기적으로 받은 사람이 여럿 있다는 것과, 삼성 사장단을 포함한 핵심 보직 임원 및 간부급 사원들 일부도 차명계좌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또 그는 “비자금 계좌를 가진 삼성 임원명단을 일부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삼성의 전 방위 로비 행각과 관련, 김 전 법무팀장은 “검찰은 삼성이 관리하는 작은 조직”이라며 “이해관계가 맞물린 재경부와 국세청 등은 규모가 더욱 크다”고 폭로했다.
그에 따르면 삼성은 검사 40~80명에게 설이나 추석 등 명절을 이용, 500만~2000만원 가량의 ‘떡값’을 풀었으며, 국세청 인사들에게는 이보다 ‘0’을 하나 더 붙여 건넸다고 한다.
삼성의 비자금 관리방법에 대해서도 그는 “구조본 안에서 검찰 간부 수십 명을 관리하고 나머지는 60여개 계열사가 나눠 관리했다”고 대답했다.
이어 비자금 출처와 관련, “(삼성그룹) 각 사에서 조성한 돈”이라며 “심지어 대형 부실을 안고 있는 만성적자의 회사에서도 수십억 원씩의 비자금을 만들었으며 조성된 바자금은 임직원 명의로 된 차명계좌에서 운용 된다”고 덧붙였다.
또한 김 전 법무팀장은 “삼성의 사장단, 고위임원, 구조본의 임원, 재무, 인사 등 핵심 보직의 임원 및 간부급 사원 중 일부가 차명계좌를 가지고 있다”며 “비자금 계좌를 가진 삼성 임원들의 명단도 일부 갖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어 그는 “삼성 내부에서는 차명계좌의 존재가 승진의 징표이자 조직이 자신을 믿는다는 일종의 훈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덧붙였다.
기자회견을 마치며 김 전 법무팀장은 “재벌이 사법체계를 국가 기관을 우리 사회를 더 이상 오염시켜서는 안 된다. 다시 한 번 자신의 죄를 반성한다”며 고개를 떨궜다.
‘삼성수사’ 시작부터 삐걱
김 전 법무팀장의 2차 양심고백이 있은 직후 ‘떡값 검사’의 명단 공개를 둘러싼 검찰과 시민단체 간의 신경전이 점입가경이다.
지난 11월 7일 서초동 대검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참여연대는 검찰이 검사명단 제출을 요청한 데 대해 “검찰이 공정하고 독립적인 수사팀을 스스로 구성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는 꼴”이라며 힐난했다.
그러나 검찰은 “로비 대상 검사의 명단을 공개 또는 제출하지 않을 경우 당장 본격 수사는 어렵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검찰은 ‘선 명단공개·후 수사’를, 고발인 측은 ‘선 수사착수·후 공개’의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
실제로 검찰은 떡값 검사 명단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수사 중간에 수사검사나 지휘라인이 로비검사 명단에 포함된 것이 드러난다면 공정성 논란이 불거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삼성 비자금 사건은 사건의 특성이나 파장으로 보아 특수부나 대검 중수부가 맡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는 BBK사건 수사에 착수했고, 대검 중수부는 서울 서부지검과 부산지검에 검사와 수사관들이 파견된 상황이다.
김용철 전 삼성 법무팀장 모두발언 전문
다음은 지난 11월 5일 오후 2시 삼성그룹 비자금 관련 2차 기자회견에서 밝힌 김용철 전 삼성 법무팀장의 모두발언 내용 전문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 부정 축재 재산 찾다, 쌍용 김석원 회장 집에서 보관하고 있던 비자금을 찾았더니 청와대에서 수사 중단을 지시했다.
제가 의지를 꺾지 않고 결국은 검찰을 떠났다. 저는 변호사 업계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사건 승임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삼성으로 갔다. 망하지 않고 월급은 꼬박꼬박 나올 거라는 생각이었다. 사실 아들 대학 등록금은 빚 안내고 보냈으면 하는 가난한 검사의 바람이었다.
삼성에 들어간 건 제 인생의 큰 실수였다. 삼성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사치했다. 대신 삼성은 제게 범죄를 지시했다. 돈으로 사람을 매수, 회유하는 불법로비는 모든 임원의 기본 책무였다. 저는 검찰을 비롯해 법조계 인물을 관리했다. 구조본 안에서 검찰 관리 수십명을 관리하고 나머지는 60여개 계열사 관리자가 나눠서 했다.
설 추석 여름휴가 일 년에 3회, 500(만원)에서 수 천 만원까지 정기적 뇌물을 돌린다. 경우에 따라서는 수십억 원을 전달하라고 하기도 했다. 범죄 공범이라는 죄의식 때문에 괴로웠다. 현직 최고위 검사 가운데도 삼성의 불법뇌물을 정기적으로 받은 사람이 여럿 있다. 밝혀야 할 공적인 기회가 오길 희망한다. 숨김없이 고백하겠다.
검찰은 삼성이 관리하는 작은 조직이었다. 이해관계가 맞물린 재경부, 국세청은 훨씬 더 크다. 돈의 출처는 각사에서 조성한 비자금이다. 심지어 대형부실을 안고 있는 만성적자를 회사에서도 수십억 원씩 비자금을 조성했다. 조성된 비자금은 임직원 명의의 차금으로 운영된다. 삼성 출신 임원들이 돈이 많은 이유는 대부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월급쟁이가 수십억, 수백 원 재산을 가질 수 없다.
삼성의 사장단, 고위 임원, 구조본 임원, 재무 인사 등 핵심 보직 임원과 간부 사원 상당수가 차명 계좌를 가지고 있다. 제가 현재 차명비자금 계좌를 갖고 있는 임원들의 명단도 일부 가지고 있다. 명백히 금융실명제 위반, 사문서위조, 조세포탈 등 범죄다. 하지만 삼성 내에서는 승진의 징표고 조직이 자신을 믿는다는 일종의 훈장이었다. 비자금 계좌가 만들어지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것도 있다. 공적기관에서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힐 기회를 갖길 기대한다.
에버랜드 편법 증여 사건에 대해서 모든 증거 진술을 조직했다. 돈과 힘으로 신성한 법조를 오염시켰다. 저도 거기 관여했다. 명백한 범죄였다. 법무팀장을 맡은 제가 중심이 되서 저질렀다. 공범으로 제가 처벌을 받아야 할 순간이 됐다. 삼성은 모든 간부가 삼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건희 회장을 위해 살아야 했다. 저는 괴로웠다. 삼성을 위해서 검찰이 국정원이 청와대가 모든 언론기관이 움직이며 실시간 정보보고를 했다. 심지어 삼성에 가장 비판적인 시민단체마저도 회의가 끝나면 회의록이 삼성에 보내졌다.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성에 등지고는 이 사회에서 황량한 뒷골목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할 거라는 주변 얘기가 많았다. 제가 일간지 칼럼을 쓰면서도 삼성 얘기를 피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삼성 기사가 나올 때마다 저를 의심하고, 압박하고 미행했다. 저에 대한 감시는 퇴사 전부터 이뤄졌다. 그러더니 삼성측 인사가 나서서 법무법인에서 내쫓고 사회에서 고립시켰다. 심지어 삼성은 인생 말년을 아내와 손잡고 산책하겠다는 소박한 꿈도 짓밟았다.
많은 언론과 시민단체에 호소했다. 하지만 외면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낭떠러지 앞에선 절망 속에서 천주교 사제단 신부님들께서 저를 잡아준 게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런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조직 동료를 배신한 사람이라고 욕해도 좋다. 하지만 재벌이 국가기관을, 사법체계를, 우리 사회를 오염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저의 죄를 고개 숙여 반성합니다.
#“삼성은 나에게 범죄를 지시했다”
김용철전 삼성 법무팀장
-문건을 공개하게 된 이유는 뭔가.
▲나는 가난하고 못 배운 부모 밑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검사시절 음주 사고를 내고 도망간 친동생과 만취 상태에서 폭행한 처남도 구속했다. 그 때문에 친가와 처가 형제들과 의절한 상태로 지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검사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전두환 비자금 수사를 하다가 쌍용 김석원 회장이 관리하고 있는 비자금을 찾아냈다. 그런데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도 굽히지 않았다. 그랬더니 바로 부천지청으로 좌천성 발령이 났다. 검사에게 수사를 하지 말라니 나가라는 소리 아닌가. 그래서 검찰을 떠나게 됐다.
변호사 업계의 현실을 잘 알고 있던 난 월급이나 제때 꼬박꼬박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삼성으로 갔다. 국가 다음으로 망하지 않고 월급이 나올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 자식 대학등록금은 빚 안지고 내자는 가난한 검사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삼성에 들어간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였다. 삼성에서 좋은 대우를 받긴 했지만 삼성은 나에게 범죄를 지시했다.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는 불법로비는 모든 임원의 기본 책무였고, 나는 법조계를 담당했다.
-김 변호사 명의 외에 또 다른 차명계좌가 있나.
▲삼성그룹 사장단과 고위임원, 구조본부, 핵심보직 등 상당수가 가지고 있다. 차명으로 비자금을 가진 임원 명단도 내가 현재 일부 가지고 있다. 이는 명백한 범죄 행위다.
-에버랜드 사건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해 달라.
▲에버랜드 일은 96년도 말에 일어났는데 나는 97년 8월에 입사해 97년 말에 실무에 투입됐다. 입사 전에 일어난 일로, 나는 나중에 법무팀장으로 일하면서 검찰 수사에 대한 대응 등 업무를 분담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이 사건이 아직 상고심에 계류 중이기 때문에 법률기술적인 문제도 있고 해서 자세한 내용은 추후에 상세하게 밝힐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에버랜드 사건에서 많은 진술과 증거가 조작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증거 조작에) 나도 관여했다.
-이재용 전무의 재산형성 과정에서 불법이 있었다고 했는데 자세히 말해 달라.
▲이재용 전무의 재산형성과정에 대해서도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있고 알 만한 분들은 알고 있겠지만, 내부 문건에 대해서는 적절한 기회에 발표하겠다.
-2002년 대선에서 삼성이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데 이건희 회장의 개인자금이 아니라 회사자금이었다는 증거가 있나.
▲친구가 선거에 출마한다고 수억 원씩 내나.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면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다”고 써라.
-검찰에 고발은 안할 건가.
▲나는 (고발이 아니라)자수해야 한다.
박지영 pjy0925@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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