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체형 바꾸기에 ‘올인’했던 기업들이 이제는 체질 바꾸기로 전환해 눈길을 끌고 있다. 제도와 시스템 구축에 주력했던 모습이 점점 줄어들고 창조와 상상력, 기업문화 같은 단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양에서 질로,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바뀌고 있는 추세다. 이런 과정에서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회의문화의 변화다. CEO의 회의 스타일은 기업 내 의사결정 방식의 거울이다. 임원회의는 각 부서회의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내 4대그룹 CEO들은 어떤 회의스타일을 가지고 있을까? 그들만의 독특한 회의 주재 스타일에 대해 알아봤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대표적인 ‘듣기형’ 리더다. 회의 때면 모든 참석자들에게 이야기를 시키고 그는 미동도 않은 채 듣기만 한다. 중간에 말을 끊거나 중단시키는 일도 없다.
그가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삼성본관에 첫 출근하던 79년 2월 27일. 고 이병철 회장은 셋째 아들인 건희를 불러 직접 ‘傾聽(경청·귀담아들음)’이라는 휘호를 써줬다.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이야말로 대기업 총수로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는 의미에서였다. 지금도 그의 좌우명 중 하나는 ‘좋은 경청자가 되자’는 것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널리 알려진 대로 이 회장은 회사에 잘 출근하지 않는다. 회의에 참석하는 일도 거의 드물다. 삼성 본관 28층에 집무실이 있지만 거의 모든 시간을 한남동에 소재한 승지원이라는 개인 집무실에서 업무를 본다. 수요일마다 본관 28층에서 최고경영자 회의가 열리지만 이 또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일단 그가 회의를 소집하면 한차례 태풍이 분다. ‘듣기’를 중요시 하는 만큼, 임직원들의 입장에서는 이 회장에게 ‘들려줄 만한’ 내용을 철저하게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건희 회장이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한 번 말을 시작하면 정해진 시간 없이 3~4시간은 기본이고 10시간을 넘게 모든 것을 쏟아낸다. 심지어 꼬박 20시간 가까이 회의를 주재했다는 일화까지 전해지고 있다.
또 그는 지시를 내리기 전 최소 6번 이상 스스로에게 “왜”라고 묻곤 한다. ▲왜 그 사업을 ▲왜 그 지역에서 ▲왜 그 시기에 ▲왜 그 사람에게 ▲왜 그만한 비용을 들여서 ▲왜 어떤 목적에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회장은 그룹의 핵심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말이 없다. 이 회장이 워낙 말이 없다보니 부인 홍라희 여사는 바로 옆에 남편이 앉아 있는데도 삼성 비서팀에 전화를 걸어 “내일 회장님 출장은 어디로 얼마동안 가나요”라고 물을 정도다.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돈을 아무리 많이 써도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신기술은 과감히 적용해. 도요타, 혼다, BMW, 벤츠보다 더 좋은 엔진을 만들어야 해. 앞으로 파워트레인 연구에는 아예 예산 한도를 없애. 돈 생각하지 말고 좋은 엔진 만드는 데만 신경 써.”
수년 전 경영계획회의에서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한 말이다. 또 그의 회의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말투를 보면 알겠지만 회의석상에서 이런 ‘지시’에는 토론이 필요 없다. 오너형 CEO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예산 따지고, 결재 따지는 전문경영인들은 감히 엄두도 못 내는 업무 스타일인 셈.
실제 정 회장은 회의를 즐기거나 마라톤 회의를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힘이라면 힘이고 독단이라면 독단이지만 어쨌든 정 회장의 카리스마는 절대적이다. 회의라 하더라도 보고와 지시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이 같은 회의 스타일은 자동차 산업의 특성상 창의성보다는 조직력을 중시해서이기도 하지만, 고 정주영 명예회장 때부터 굳어진 가부장적인 현대의 가풍을 이어받은 영향도 크다.
한편으로, 정 회장에게 계열사 사장단 회의는 점검의 기회이기도 하다. 수많은 공장과 계열사를 일일이 챙길 수 없는 그룹 회장의 특성상, 사장단 회의는 그룹 전체를 점검하는 시간인 셈이다.
또 가끔 나오는 정 회장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는 것도 회의석상에서 중요한 일이다. 정 회장은 계열사 사장단들에게 이런 저런 지시를 내리며 불시에 질문 공세를 퍼붓는데, 이때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못했다가는 불같은 호통이 떨어진다고 한다.
지근거리에서 정 회장을 보좌했던 현대차그룹의 한 임원은 “정 회장이 입을 열었다 하면 주변에 얼음이 얼었다”며 “정 회장이 주재하는 회의는 결정과 방침을 위한 것이지 중구난방으로 토론하는 자리가 아니다”고 설명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경영권 위기를 겪기 전까지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주로 회사 경영진과의 논의보다 혼자서 사업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이를 임직원들에게 제시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경영권 위기를 겪은 후에는 직접 이사회에 참여해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경영진의 의견을
듣는 등 좀 더 외향적으로 변했다.
SK그룹은 직원들이 자유롭게 음료 하나씩을 들고 회의를 하는 ‘캔미팅’으로 유명하다. 고 최종현 회장이 유학시절 경험을 살려 SK만의 독특한 기업문화로 자리 잡게 한 캔미팅은 조직구성원들이 일상의 업무활동과 차단된 장소에서 정해진 경영과제에 대해 격의 없이 논의하는 회의방식이다.
한 마디로 최 회장이 주재하는 회의스타일은 ‘격식파괴’와 ‘자유로운 토론’을 중시하는 ‘캔미팅’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 SK그룹의 사장단 회의는 그룹의 수뇌부가 모이는 엄숙한 자리이면서도 상당히 부드럽다는 평이다. 매달 한 차례 열리는 사장단 회의는 모두 15명의 사장단이 참석하며, 보통 1시간 30분동안 진행된다.
한편, 토론은 즐기지만 말 수가 적은 최 회장은 그룹의 중장기적인 어젠다를 제시하고, 나머지는 임원들 간 다양한 논의가 오갈 수 있도록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구본무 LG그룹 회장
그룹 총수 가운데 유난히 소탈하고 검소한 면이 많은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회의 스타일에서도 이런 면이 잘 드러난다. 격식을 자제하고 ‘인화’를 강조하다보니 회의 분위기 역시 온화하고 부드러운 편이다.
평소 그는 일장연설을 하지 않는다. 길게 말하는 것을 되도록 삼간다.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기 보다는 2~3분간 할 말만 ‘딱’ 하고, 대부분은 임원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주재하는 회의도 많지 않다. 연간 3~4회 임원회의 겸 세미나를 주재하는 게 거의 전부다. 회의는 주로 LG트윈타워 대강당에서 개최하지만, 때로는 경기도 이천에 있는 LG 인화원을 이용하기도 한다.
구 회장이 주재하는 회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편안함’과 ‘격식파괴’다. 무엇보다도 그는 편안한 회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 그래야 진솔한 얘기가 나올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예를 들어 회의를 하다가도 분위기가 경직되면 “커피한잔 합시다”라며 직접 커피를 타서 마신다. 평소 노타이 차림이 잦은 구 회장의 소탈한 성품 그대로다.
또 그는 자신의 말을 외부 전문자를 초빙해 대신하기도 한다. 2005년 8월 25일부터 양일간 열린 ‘LG그룹 글로벌 CEO 전략회의’ 때도 그랬다. 이날 회의에는 조 후지오 도요타 자동차 부회장이 초빙됐다. 강연 주제는 ‘고객 가치 중심의 도요타 경영 방식’. 지난 2006년 구 회장이 유달리 강조해왔던 ‘고객 만족 경영’과 같은 주제다. 결국 후지오 부회장의 입을 빌린 구본무 회장의 메시지였던 셈이다.
박지영 pjy0925@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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