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박 대표는 한나라당의 ‘희망’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기 정권 창출을 위해선 박 대표의 역할이 막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내에선 ‘박근혜=대처’라는 이미지 메이킹 작업에 착수했다. 이른바 ‘뉴 박근혜 플랜’인 셈이다. 마거릿 대처 전수상은 1925년 영국의 시골 도시인 그랜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알프레드 로버츠이며, 결혼 전 이름은 마거릿 로버츠이다. 대처를 이해하기 위해서 대처의 어린 시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건 현재의 박근혜 대표를 이해하기 위해 박 대표의 어린 시절과 과거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대처의 아버지는 열성적인 감리교 신자였다. 대처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대처의 아버지는 근면, 검소, 성실 등을 그 핵심으로 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박 대표의 한 측근은 “박 대표도 아버지 박정희 전대통령의 생활신조를 그대로 빼닮았다. 즉 박 전대통령이 비록 독재와 인권 유린을 했지만 개인 생활면에서 근검 절약하고 성실한 것은 유명했고, 박 대표 자신도 아버지의 생활신조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영향뿐 아니라 어린 대처가 살았던 그랜덤시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그랜덤시는 과거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정신인 근면, 검소와 엄격한 도덕률이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도시였다. 즉 과거 영광의 상징이었던 대영제국의 사회 분위기가 감돌던 도시였던 것이다. 어린 대처의 꿈은 ‘영국병’에 걸려 허덕이고 있던 조국 대영제국의 영광을 되찾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 꿈은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대처가 평생 추구했던 이상이었다. 박 대표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버지 박 전대통령이 이룩했던 근대화의 업적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가 큰 꿈을 꾸는 것은 바로 이 근대화의 기적을 지금 총체적 도탄에 빠져 있는 대한민국에서 실현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 정치가 논리적인 정강 정책보다는 이미지나 감성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무리 유권자들이 선거전에 정책과 인물을 보고 투표한다고 해도 뚜껑을 열어보면 지역감정이 선거의 결정적 요소임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한나라당 부설 여의도 연구소의 한 연구위원은 “솔직히 정강 정책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대표의 얼굴과 이미지”라고 한국 정치 현실을 밝혔다. 박근혜 대표는 한국 정치사상 가장 집권에 근접해 있는 ‘여성 정치인’이다. 이건 다른 어떤 이미지로도 따를 수 없는 최고의 히트 상품 목록이다. 박 대표가 대처에서 벤치 마킹 하려는 것도 바로 “여성이면서도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정치인” 이미지이다.
피노체트와 박정희
박 대표와 대처 둘 다 보수적 기질의 정치인이다. 그리고 그들이 존경하는 인물도 강력한 보수 정치인인 피노체트와 박정희이다.대처는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해 노골적인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썼다. 그리고 이를 관철하기 위한 정치술로서 그는 칠레의 독재 정치인 피노체트를 원용했다. 피노체트는 칠레의 사회주의 정부 아옌데를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강력한 독재를 휘둘러 칠레를 근대화로 이끈 정치인이다. 대처는 심지어 1998년 영국 정부에 의해서 체포된 피노체트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피노체트가 1982년 포클랜드에서 전쟁을 벌일 때 영국 정부를 위해서 군기지와 아르헨티나 군사 정보를 제공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다. 대영제국의 영광을 위해서는 어떤 독재와도 손잡을 수 있다는 것이 대처의 사상이었다. 박근혜 대표도 피노체트와 거의 유사한 박정희 전대통령을 모델로 삼고 있다. 정치 전문가들은 “박 전대통령이 가난에 허덕이던 대한민국을 배불리 먹게 만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권유린과 독재는 그 과정 속에서 일어난 불행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박 전대통령의 업적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박 대표는 아버지의 장점을 차용할 것”이라고 정치인 박근혜의 입장을 설명했다.
신자유주의 등에 업고
대처가 총리에 당선된 1979년의 영국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높은 인플레이션과 저성장, 그리고 끊임없는 노사 분규로 국가 경쟁력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으며, 영국인들은 좌절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대처는 영국 사회의 모든 문제의 원인을 정부의 과도한 간섭에서 찾았다. 이런 이유로 대처는 2차 대전 이후 전세계의 커다란 흐름이었던 케인즈의 ‘큰 정부’ 대신 ‘작은 정부’를 지향하였다. 어린 시절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과 함께 대처에게 강한 영향을 준 것이 신자유주의 이론가인 하이예크와 밀턴 프리드먼이었다.
이것에 의해 ‘대처리즘’이 탄생한다. 이들 경제학자는 신고전파로서 ‘국가의 개입은 모든 악의 근원’이라며, 작은 정부를 주창하였다.박근혜 대표의 정치·경제 입장을 대변하는 박세일 당선자도 이와 비슷하다.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는 노무현 정부의 포퓰리즘적 기업 규제에서 찾을 수 있다. 기업의 투자 의욕을 꺾고 성장보다는 분배 정책에 치중하니 국가 경쟁력이 바닥을 헤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 사유의 필연적 귀결이 친기업적 입장과 노동조합 탄압이다. 대처는 1974년 탄광노조의 강경투쟁으로 인해 보수당이 총선에서 패배하는 것을 보고 노조의 힘을 무력화하지 않고서는 강력한 영국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처는 법률을 개정한 후 ‘법과 질서’에 의한 정부의 통치 방식을 천명하게 된다. 즉 ‘법과 질서’에 어긋나는 행동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응징하겠다는 것이다.
대처는 1984년 3월 “1985년 중에 채산이 맞지 않는 탄광 약 20개소를 폐쇄, 통합하고 구조조정을 통해 합리화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당연히 탄광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이며 저항했지만 ‘철의 여인’ 대처는 이것을 간단히 제압했다. 아울러 수많은 공기업을 민영화한다. 공기업이 민영화되어야 기업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고, 더불어 추락한 국가 경쟁력이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박 대표의 경제적 이론가인 이한구 당선자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방만하게 운영되는 각종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노동조합의 지나친 욕구를 그냥 놔두어서는 안된다. 정부는 법과 원칙을 철저하게 관철시켜 시장경제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박 대표의 노사 정책 관점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철저하게 친재벌 위주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편다는 점에서 대처와 박 대표는 대단히 흡사하다.
옛 영광을 위하여
대처가 가장 그리워했던 것은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만들었던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이었다고 한다. 대처가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서 1982년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 전쟁을 치른 것도 빅토리아 여왕의 좌우명인 “우리는 패배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야성의 회복에 있었다. 대처가 노조를 탄압하고 지나친 복지병을 고치고 하는 등 영국 재편에 나선 것은 이런 ‘옛 영광의 회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표도 “아버지 시대의 영광을 다시 한 번”이라는 불멸의 동기 의식이 있다고 한다. 정치인이 자신의 카리스마가 부족할 때 들고 나오는 것이 역사 속의 인물이나 사건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다. 대처와 박 대표는 이 점에서도 동일한 계산을 하고 있다.
이상봉 pneumas@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