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의장이 충분히 예상되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문화일보 현직 정치부장이었던 민 당선자를 무리하게 끌어들인 것은 바로 민 당선자의 이런 능력과 인간미를 크게 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민 당선자는 이른바 ‘빵잡이’이다. 성균관대 시절 골수 운동권이었다. 아내 목혜정씨도 이화여대 운동권으로 둘은 ‘동지적 애정’으로 만나 열애 끝에 결혼했다. 민 당선자의 동생도 골수 운동권으로, 민 당선자의 어머니는 한 집에서 돌아가면서 세 명이나 투옥되는 바람에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듯이 나라가 독재 정권에 의해 어려울 때 온 몸을 바쳐 싸웠던 민 당선자가 조용하게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아내와의 애틋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에서 우리 사회의 발전을 느낄 수 있었다. 민 당선자는 우리당 입당 과정에서 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깨끗이 인정하고, 대신 비전과 정열로써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그는 교육과 문화와 정보통신에 전문가적 식견과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민 당선자는 강원도 횡성 출신인데 어린 시절부터 책을 끼고 살았다고 한다. 그 독서 편력은 감옥 시절을 거쳐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민 당선자는 어린 시절 읽은 일본책 <학교는 죽었다>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영어 참고서나 입시 지옥에서 벗어나 학생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마음껏 키울 수 있는 새로운 학교를 꿈꾸고 있다. 자식 교육에서도 그는 중 3 아들, 초 3 딸을 키우면서 가급적 ‘아니오’를 남발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식의 입장을 가급적 긍정하는 것이 최고의 교육이라는 지론 때문이다. 문화에 대해서도 민 당선자는 구체적 복안과 대안을 가지고 있었다. 삼성과 같은 대기업이 막연히 장학재단 5천억을 조성하는 것보다 <정보화고등학교> 같은 것을 만들어서 정보화 예비군을 구축하거나 실업계 학교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지방 소도시나 영종도 같은 곳에 <예술 전문 전시장>이나 <한류(韓流) 고등학교> 같은 것을 만들어 돈이 모이는 것과 문화 예술을 병행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론인 출신이어서인지 클래식 문화와 대중 문화의 융합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정보통신분야에 대해서도 민 당선자는 조예가 깊었다. 그는 96년 우리나라에 인터넷이 도입되기 시작할 때 30대의 늦은 나이로 인터넷 전문기자를 자원했다고 한다. 당시 태반이 20대인 기자 사회에서 일종의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미래를 준비했다고 한다. 이렇게 다재다능한 민 당선자이지만 초선의원으로서의 포부와 비전을 설명할 때와 달리 우리당의 현재와 미래를 말할 때는 조금 걱정스러워한다.
복잡다단한 당 내 상황과 온갖 복병이 도사린 외부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고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당은 처음부터 어려운 과정에서 시작되었고, 지금도 철저하게 민주주의적 과정으로 중지를 모아나가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민 당선자가 이런 패기와 열정을 계속 지켜나갈 것인지 아니면 또 하나의 ‘직업 정치인’으로 굳어질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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