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독자적인 신기술일까? 일본기업의 기술전수일까? 129억원의 승소일까? 3000억의 승소일까? 대기업에 대한 중소기업의 선전포고일까? 아니면 도산위기에 몰린 중소기업의 억지주장일까? 우리나라에서 좀처럼 일어나기 힘든 소송이 최근 벌어졌다. 이번 소송에 걸린 액수만 3000억원, 금액에서 알 수 있듯이 반도체 제조공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 장비인 그로워(Grower)와 관련된 법적 분쟁이다. 세계를 통틀어 4개국밖에 갖고 있지 않는 독자적인 기술에 대한 재벌과 중소기업간 한판 승부다. 무엇보다 대기업에 대한 중소기업의 배짱 두둑한 소송이라 주목을 받고 있다.
반도체 기판의 기초소재인 웨이퍼를 생산하는 LG 실트론(이하 실트론)과 웨이퍼를 만들 수 있게 하는 그로워를 생산하는 퀄리플로나라테크(이하 나라테크)의 소송사건. 그러나 어느 쪽이 승소하느냐에 따라서 판이한 결과가 나오게 된다. LG측이 승소하게 된다면 나라테크는 일본 회사의 독자적인 기술을 인수받아 해외로 빼돌린 파렴치범이 된다. 반대로 나라테크의 승소로 끝나면 우리나라는 세계 5번째 신기술을 보유한 국가가 된다. 그러나 양사의 주장은 판이하게 상반된다. 어느 한 쪽은 100%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거짓말탐지기’를 가동해 그들의 미세한 떨리는 음성을 확인해본다.
이번 소송의 발단은 2000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LG 실트론은 일본의 미쯔비시사 계열사인 미쯔비시 머티리얼 테크노 코퍼레이션 (Mitsubishi Materials Techno Corporation)로부터 8인치 반도체 소자용 그로워(실리콘 단결정 성장장치)를 수입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외 수입에 의존하는 것에 불안을 느낀 실트론 측이 반도체 소자용 그로워 국산화 전략 개발을 나라테크와 함께 진행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LG, 제3자 판매금지조항 관련 129억 소송
나라테크, 제3자 구매금지 위반 등 관련 3000억 맞소송
실트론 측은 “원천기술을 보유한 일본 M사에서 15년간 축적한 노하우를 실트론만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중소기업인 나라테크에게 100% 기술지원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M사에서 넘겨받은 설계도면을 자사의 직원이 나라테크에 상주해 부품 구매처까지 일일이 가르쳐가며 기술개발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라테크는 “2000년 5월말 실트론 측에서 8인치와 12인치 반도체 소자용 그로워 자체개발을 의뢰받아 개발에 들어갔고 2002년 10월 23일 세계에서 4번째로 12인치 반도체 소자용 그로워 개발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또한 실트론 측에서 건네받은 것은 설계도면이 아니라 공개된 사용설명서(메뉴얼)뿐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로워 기술에 양사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 기술은 2007년 현재 전 세계 5개의 기업에서만 만들 수 있는 어려운 기술일 뿐만 아니라 요즘 각 기업에서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삼고 있는 태양전지용 웨이퍼 시장의 핵심기술이기 때문이다.
또 분쟁이 되고 있는 부분은 ‘제 3자 판매 금지조항’이다.
실트론 측은 나라테크가 공동기술개발 협약서에 ‘제3자 판매 금지조항’을 어기고 미국과 국내 등 4곳에 판매하다 적발돼 상호기밀유지 및 기술정보 침해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계약위반으로 2006년 9월에 129억원을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했다.
그러나 나라테크는 “실트론이 2003년 6월 전략적 제휴 협약서에 반도체소자용 그로워를 매월 1대, 2004년 이후에는 매월 2대씩 구매해주겠다고 해 총 100억을 투자해 개발에 성공했으나 73대 발주량 중 15대만 구매해 2005년에는 적자폭이 47억원에 달해 심각한 자금난에 빠졌다”고 했다.
이에 도산위기에 빠져 어려움을 호소하자 “독자 생존하라”며 판매금지대상이 아닌 태양전지용, 식각장비용 그로워에 한해 3자 판매를 구두로 승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트론 측이 3자 판매를 승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2006년 5월 15일 일방적으로 협약 해지를 통보했으며 협약해지를 통보한 후 6월에도 8인치 반도체 소자용 그로워 4대, 12인 반도체 소자용 그로워 6대를 발주시킨 뒤 일방적으로 취소해 수억원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다는 것.
그러나 갑자기 실트론 측이 3자 판매금지 조항을 위반했다며 129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고 재산을 가압류했다는 것이다.
실트론 측이 재정난을 이용해 부도를 나게 한 뒤 국내 시장을 독점하려 했다는 주장이다.
나라테크 “중소기업 죽이는 사기극”
LG 실트론 “정당한 일본 기술이전”
분쟁이 되고 있는 부분은 실트론 측이 나라테크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술을 임의로 현빈테크에게 넘겨 자사의 핵심기술과 영업비밀을 유출했다는 것이다.
나라테크는 실트론 측이 대규모 발주와 제품의 검수를 이유로 설계도면 및 부품업체의 정보를 요구했고 거부할시 발주를 취소하겠다는 협박을 해 핵심기술정보인 8인치 반도체 소자용 그로워의 제작도면 487매, 12인치 반도체 소자용 그로워 승인도면 71매, 제작도면 515매를 제출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기밀문서를 현빈테크와 화산기계 등에 유출해 자사의 소자용 그로워와 동일한 기계를 만들었고 이 회사들로부터 반도체 소자용 그로워 및 마그네트 승강 장치를 납품받아 제3자 구매금지 위반, 영업비밀책임 등으로 인한 손해배상으로 3000억원을 청구했다.
하지만 실트론 측은 “일본 M사의 기술을 인수받았으면서 독자 개발인양 주장하는 것뿐이라며 계약해지에 의한 정당한 기술이전이었다”고 밝혔다.
몇 가지 의문점도 발견된다. 우선 LG 실트론 측이다.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M사가 15년 동안 축적한 세계적인 기술을 LG 실트론에 무상으로 제공했다는 것이다.
또한 나라테크 사건처럼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LG 실트론에게만 독점으로 그로워를 제공한다는 조건이라면 현빈테크같은 제 3기업에게 언제든지 기술을 넘겨도 된다는 계약을 했다는 사실이다.
실트론 측은 “그동안 15여 년 동안 쌓아온 남다른 기업의 정이 쌓였으며 지금까지 충분한 물질적 보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렇다하더라도 M사는 자신들의 비밀정보가 유출의 1차 책임이 있는 실트론과 2차 책임이 있는 나라테크를 고소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도 “M사가 나라테크를 상대로 고소를 하려고 했으나 실트론 측이 이미 고소를 한 상태라서 굳이 강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실트론은 말썽이 생길 수 있는 핵심기술을 자회사를 만들어 직접 개발하지 않고 중소기업에 기술전수를 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일본기업은 수직구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모호한 말을 남겼다.
또 이번 사건의 핵심이 되는 일본 M사와 맺었다는 기술이전에 대한 계약서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계약서를 공개할 경우 비밀유출이 되기 때문에 굳이 할 필요가 없다”며 “추후 법정에 제출해 판사의 판결을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이 같은 의문점은 나라테크도 마찬가지다. ‘제3자 판매금지조약’에 대해 계약했음에도 그로워 장비를 미국과 국내에 판매할 당시 실트론 측에게 단지 구두로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한 협약해지통보서를 받고 제정 난에 시달리면서 실트론 측의 그로워 10대 발주도 단지 구두로 받았다는 것이다.
이미 구두계약으로 인한 피해있었음에도 중요한 사항마다 구두계약을 체결한 것.
끊이지 않는 의혹들 한쪽은 새빨간 거짓말
이에 대해서 실트론 측은 “대기업과 하청업체의 관계에 대해서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상명하복의 관계다” 며 “실트론 사장이 무릎을 꿇고 빌 정도였으며 차마 계약서를 써달라고 말하기도 힘든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또 수십억의 적자를 보며 중소기업인 나라테크가 기업을 어떻게 유지하고 있느냐에 대해서도 “경영 부사장이 금융계 증권 애널리스트 출신으로 자신의 집을 담보해서 월급도 주고 여기저기서 대출을 받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나라테크의 소송대리를 맡고 있는 법무법인 일조의 나국주 변호사는 “대기업이 대량발주를 미끼로 중소기업을 제품개발에 끌어들이고 제품의 검수를 빌미로 제작기술을 획득한 다음 발주를 중단해 개발업자를 고사시키는 대기업의 부도덕한 상술의 전형이다” 며 “결국 부도난 제품과 기업을 인수해
국내 시장을 독점하려고 하는 검은 의도가 감춰져 있다”고 강조했다.
독자개발 기술로 2005년 대한민국 10대 기술로 선정돼 대통령 표창을 받은 나라테크.
지난 13일 산업자원부로부터 그로워 생산성 향상과 생산 공정의 안정화를 위해 0.4~0.23mm정밀도를 향상시킨 세계최대 사이즈 12인치 반도체 웨이퍼용 상용화 기술이 독자기술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LG의 계열사로 반도체 소자용 웨이퍼를 생산하는 세계 5위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LG실트론과 협력관계에서 먹고 먹히는 첨예한 대립관계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업체와 하청업체 평등하지 못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법적인 공방.
현재까지 무한경쟁의 기업세계는 대기업의 횡포와 중소기업의 대응이 하루가 다르게 존재하고 약육강식 법칙이 통용되는 유일한 곳이었다.
이번 소송을 지켜본 대다수 기업인들은 기술력만이 판단기준이 되길 바란다는 주장이다. 어차피 승부의 세계에서 승자와 패자는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화제의 대기업-중소기업 특허분쟁
대법 상고심 희비 엇갈려
중소기업과의 특허분쟁으로 대법원까지 간 상고심에서 LG텔레콤이 패소해 재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LG텔레콤은 자사에서 사용하고 일본 특허와 중소업체인 서오텔레콤의 특허가 비슷하다며 서오텔레콤을 상대로 비상호출장치 무효소송을 냈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LG텔레콤이 제시한 일본 특허에는 비상시 도청기능 등 일부 핵심기술이 빠져있다” 며 서오텔레콤의 손을 들어줬다. 또한 원심이 서오텔레콤 특허에 대한 진보성을 부정한 것은 발명의 진보성에 대한 법리에 대한 오해라며 결정을 뒤엎었다.
이에 서오텔레콤은 LG텔레콤의 휴대전화 긴급구조서비스에 대한 특허사용료 청구와 함께 손해배상소송도 낼 전망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LG 실트론과 나라테크의 소송도 일본의 원청 기술과 관련해 승부가 날 것으로 보인다. LG 측이 패소할 경우 높은 기술료를 주고 일본 특허 기술을 사들여와 국내 중소기업의 기술을 죽이기 위한 소송만을 일삼는다는 비난을 모면하기 어려워진다.
일본기술은 원천기술이고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기술은 표절이라는 해석을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LG가 어떻게 대응할 지 주목된다.
‘다함께 사랑을 더불어 행복을’ 외치는 LG는 유독 일본기업과의 상생에는 협조적이면서 국내 중소기업과는 곳곳에서 마찰을 빚어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지가 관심이다.
백은영 aboutp@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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