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 8차 협상이 있었던 서울 하얏트호텔. 협상 마지막 날인 지난 3월 12일 A분과 회의장엔 냉기가 흘렀다. 몇 달을 끈 쟁점의 타결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미국 쪽이 갑자기 단서 조항을 요구하자 한국 대표측(분과장)이 “더 이상 협상 못 하겠다”며 서류를 집어던졌다. 결국 이 쟁점은 미국이 한발 물러서는 것으로 합의점을 찾았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진행된 FTA 협상장 안팎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FTA 최종 타결 내용 발표 때까지 있었던 협상장 막후와 에피소드들을 모아본다.
미 재무 차관보 가로 막으며“이대로는 못 간다”
무엇보다도 FTA 협상 타결 주역들의 뒷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피 말린 핵심 쟁점 분야 책임자는 4명. 이재훈 산자부 차관, 민동석 농림부 농업통상정책관, 김성진 재경부 국제업무정책관 등이 ‘최종 해결사’로 투입됐다. 협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농업·자동차·섬유·금융 분야가 핵심 쟁점으로 압축됐기 때문이다.
협상 자체를 깰 수도 있는 민감 분야를 다루는 실무 책임자들은 하나라도 더 얻고, 덜 양보하기 위해 밤샘 협상을 벌여야 했다. 한 협상 책임자는 신경전을 벌이다 “이럴 때 한국 사람들은 한국말로 ‘배 째라’고 한다”고 말해 협상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통역을 통해 이 말을 전해들은 미국
쪽 관계자들이 어이가 없다는 듯 그냥 웃고 넘겼다는 후문이다.
우리 협상단 중 가장 부각된 사람은 두 명이다.
김현종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과 김종훈 한국 측 협상 수석대표가 그들이다. 이들 뒤엔 밤잠을 설치며 실무를 챙겨온 수백 명의 협상단 관계자들의 땀도 숨겨져 있다. 2백70여 명까지 늘었던 협상단은 3월 말부터 서울 한남동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의 막바지 협상 땐 70여 명으로 압축됐다. 17개 분과, 2개 작업반에서 일한 협상단 관계자들은 변호사를 포함한 민간인들도 있지만 대부분 공무원이었다. 소속 부처도 외교통상부, 재정경제부, 산업자원부, 농림부, 정보통신부, 문화관광부, 환경부 등 10여 곳으로 다양했다.
협상 간부들의 우회전술과 두뇌전쟁, 끈질긴 공격적 협상도 흥미롭다. 농업 분과장을 맡았던 배종하 농림부 국제농업국장은 협상 타결을 하루 남기고 우리쪽 으로선 농업 분야에서 더는 ‘내 줄 것’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라도 양보해 달라는 미국 요구에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 시를 들먹여 화제가 됐다. 서울서 열렸던 8차 협상 기간 중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의 영문 번역본을 미국쪽에 보냈던 것. 일종의 우회전술이었다.
또 금융 분과장을 맡았던 신제윤 재경부 국제금융심의관은 협상 타결 초읽기에 들어간 4월 2일 아침 8시 직원들에게 빵을 사다 주려고 편의점에 다녀오면서 호텔 공항버스 주차장에 클레이 로어리 미 재무부 차관보가 짐을 들고 서있는 것을 봤다. 마지막 핵심 쟁점이던 ‘금융 일시 세이프가드’를 양보한다는 미국쪽 의사를 확인 못한 신 심의관은 그의 앞을 가로 막고 ‘이대로는 못 간다. 확답을 해 달라’고 버텼다. 당황하던 로어리 차관보는 웃으며 “기대해도 좋다”고 말한 뒤 공항버스에 올랐다. 실무진에게 세이프가드를 양보하도록 지침을 주고 떠난 것. 금융 일시 세이프가드는 우리나라에서 자본이 급속하게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안전 조치로 외환위기를 겪었던 우리로선 간절한 사안이었다.
협상단 비자 기한 끝나 애태우기도
협상 결과에 대해 이해 관계자들에게 욕을 먹어야 하는 처지는 양쪽 다 같았다. 막판 고위급 회담이 한창이던 3월 말 미국 쪽 농업분과 대표인 리처드 크라우더 USTR 농업부문 수석 협상관은 배 국장에게 “협상 결과를 보니 우리쪽 업계가 너무 불만이 많아서 이 상태로는 도저히 미국에 돌아갈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이에 배 국장은 “나도 협상이 끝나면 욕 좀 많이 먹을 텐데 내가 미국 가서 살 테니, 대신 당신이 한국에서 살라”고 답해 서로 웃고 말았다. 우리 협상단의 작은 실수도 화젯거리였다.
지난해 12월 미국 몬태나에서 열린 협상에 참가하기 위해 공항에 도착한 한국 협상단의 한 분과장이 갑자기 “비자 기한이 끝났다”며 당황한 것. 협상을 위해 온갖 서류 준비를 하느라 자신의 여권은 정작 챙겨보지 못했던 게 문제였다.
외교부는 ‘외교력’을 총동원, 이 분과장의 미국 비자를 다음 날까지 재발급해줬고 협상은 예정대로 무사히 진행됐다. “We have a deal(합의가 됐다).” 마지막 협상 시한을 20분 남겨 둔 4월 2일 낮 12시 40분. 모처에서 우리쪽 협상단과 협정문안의 최종 조율을 마친 김현종 본부장은 카란 바티아 미 무역대표부 부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문안을 최종 확인하고 미국 쪽에 던진 말은 ‘We have a deal’이란 짧은 문장. 14개월간 기나긴 협상의 마침표를 찍는 한마디였다. 특유의 ‘포커페이스’인 김 본부장은 이때도 웃음 없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주변에 있던 우리 협상단은 이 순간 분위기가 참으로 엄숙했다고 전한다. 협상 결과가 만족스러운 분과도 있고, 그렇지 못 했던 분과도 있었던 까닭이다. 협상단 관계자는 “김 본부장의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무겁고도 복잡한 감정이 밀려 왔다”고 말했다.
상장 철벽 경호에도 두 차례 뚫려
국제회의에서 중요시 되는 경비와 도청 방지 관련 에피소드들도 재미있다. 협상 타결 발표를 1시간여 앞둔 4월 2일 오전 11시 44분. 한 남성에게서 협상장인 하얏트호텔로 전화가 걸려왔다. “호텔 곳곳에 폭발물을 설치했으니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협상장엔 1백여 경찰과 탐지견을 동원, 폭발물을 탐지하는 등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1시간의 수색 끝에 단순 협박 전화로 드러났다. 전화는 서울역 부근 공중전화를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협상 기간 내내 하얏트호텔은 공항을 방불케 할 정도로 삼엄한 경비와 검문검색이 이뤄졌다. 호텔을 드나들기 위해선 정문에서 신원을 확인한 뒤 출입 현관에서 검색대까지 통과해야 했다. 호텔 내 협상단이 묵는 방 주변을 24시간 경찰이 경비했다. 주요 협상단이 호텔을 출입할 땐 기자와 일반인들 접근을 막기 위한 인간 띠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시위대 접근을 막을 수 있다는 장점을 내세워 8차 협상 때부터 서울 신라호텔에서 서울 하얏트호텔로 옮겼지만 FTA 반대론자들에 두 번이나 경호가 뚫리는 사태가 빚어졌다. 또 경찰의 철벽 경비에도 사건이 벌어져 아쉬움을 남겼다. 4월 1일 하얏트호텔 정문에서 한·미 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 소속 회원 1명이 분신자살을 꾀한 것이다.
양쪽 협상 대표들은 도청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미국 협상단의 경우 회담장 주변에 도청장치가 있을까 싶어 첨단장비까지 동원했다. 또 협상단 모두 도청되지 않는 휴대전화만 썼다는 후문이다. 막후에서 협상을 이끈 카란 바티아 미 무역대표부 부대표는 본국과의 중요 통화 땐 주한 미국 대사관을 이용했을 정도로 보안에 철저했다.
하얏트호텔 식당은 ‘울고’ 부근 식당은 ‘웃어’
점잖은 외교석상이지만 두 쪽 다 예의만 차리자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때론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기도 하고, 상대를 흥분시키기 위해 일부러 자극적 표현을 쓰기도 했다. 서비스 분과에서 우리쪽 “미국 통신 산업의 외국인 지분 제한을 높여 달라”고 하자 미국쪽은 “너희들은 그만큼 살 돈도 없잖아!”라며 모욕적인 답으로 되받았다. 감정을 건드린 것이다.
우리 분과장은 “협상에서 기 싸움을 벌이느라 얼굴을 붉히는 일이 가끔 벌어졌다”고 말했다.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고 한 뒤 30~40분씩 자리를 비우는 일도 잦았다고 귀띔했다. 또 협상 기간 중 폭탄주도 등장해 화제였다. 19개 분야의 일부 협상 책임자(분과장)들은 숙소나 협상장 밖에서 식사를 하거나 폭탄주로 우의를 다졌다.
협상 기간 중 의사소통 언어는 당연히 영어였다. 우리 쪽 분과장들 대부분이 미국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아 영어가 능통하며 분과장이 직접 영어로 말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너무 전문분야가 다뤄지거나 협상 참가자들의 정확한 이해가 필요할 때만 통역이 동원됐다. 한 분과장은 “일부러 통역을 쓰지 않았다”고 회고 했다. 그는 “이전에 합의했던 내용을 뒤집을 때 ‘영어 실력이 짧아 지난번에 의견을 잘못 전달했다’고 우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협상장인 호텔은 ‘울고’ 부근 식당은 ‘웃어’ 대조적이었다. 별 5개의 하얏트호텔은 전쟁터로 변했다. 수백 명의 취재진과 경호경찰로 협상기간 내내 로비가 북적거렸다. 협상시한이 이틀 늘어난 주말엔 결혼식 등 각종 행사까지 겹쳐 아수라장이었다. “남는 것도 없다. 정부가 하는 일이니 협조할 수밖에…” 호텔 직원들 투정이 쏟아졌다. 반면 호텔 앞 식당들은 때 아닌 돈벼락을 맞았다. 호텔식당 이용이 부담스런 취재진과 경찰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식당주인들은 “손님이 밀려와도 힘든지 모르겠다”며 즐거운 비명이었다. 하얏트호텔은 이번 협상 유치로 5억원대의 수입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불꽃 튀긴 FTA협상 취재 전쟁 현장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마지막 협상장인 서울 하얏트호텔의 취재현장은 총성 없는 전쟁터와 같았다. 총, 포로 싸우는 군인들처럼 기자들은 펜과 마이크, 노트북, 카메라를 들고 뛰었다. 국민들의 눈과 귀 노릇을 하기 위해서였다. 신문, 방송, 잡지, 인터넷 매체 등 소속 구분 없이 북새통 속을 밤 낮으로 누빈 것이다.
가장 힘들었던 건 숙식 해결과 송고였다. “기자인지! 노숙자인지!” 끝장 협상 취재차 호텔을 찾은 한 기자가 내뱉은 탄식이다. 호텔방을 구하지 못한 2백여 내외신 기자들은 로비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거나 기자실 의자에 기대 잠을 청했다. 3월 31일 새벽엔 폭우로 임시 마련된 야외기자실 지붕에서 비까지 줄줄 샜다. 기자들은 빗방울을 맞으며 기사를 쓰거나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송고했다. 밤샘 취재를 해야 하는 기자들은 곳곳에서 싸늘한 칼바람 속에 떨어야 했다. 4월 2일 오후엔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폭염에 시달려야만 했다. 비닐하우스가 따로 없었다. 호텔 측은 지하 중식당을 임시 프레스센터로 내놨지만 장소가 좁아 기자단들은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김현종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과 김종훈 한국 측 협상 수석대표가 나타나면 경호경찰과 취재진들의 격한 몸싸움이 벌어져 아수라장이 됐다. 두 쪽 모두 지칠 대로 지쳐 신경이 곤두선 탓에 욕설이 오갔고 멱살잡이도 벌어졌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밤샘 협상이 며칠째 이어지면서 협상단은 물론 언론사 취재진들도 지쳐갔다. 새벽 시간 취재진들은 라면과 빵으로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식사 역시 쉽지 않았다. 한 협상단은 “내 평생 이렇게 많은 기자들을 보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부대끼며 ‘전장’을 뛰어온 기자들을 허탈하게 만든 건 FTA협상 타결 결과 발표장에서였다. 부실하게 만들어진 자료에 실망하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당초 예상은 자료가 적어도 1백여장에 이
를 것으로 봤으나 막상 기자들 손에 쥔 것은 달랑 5장. 적은 분량의 자료도 그렇지만 기사 방향을 잡지 못해 애를 먹는 기자들이 많았다. 협상 분야는 모두 19개였다. 17개 분과에다 자동차, 의약품 작업반까지 포함된 것이다.
자료 내용에서도 분명하지 않은 게 여럿 있었다. △개성공단 △상품 관세 철폐 계획 △서비스시장 개방 시간표 등이 그것이다.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최종 결과는 두고 볼 일이다. 개성공단 문제는 6자 회담과 맞물린 사안이라 양쪽의 해석 차이가 생기고 있다.
‘보도 자료는 협상단이 서로 내세우기 좋은 것들만 추려 모아놓은 것에 불과했다’는 지적들이 꼬리를 이었다. 언론에 보도된 내용들보다 못한 수
준이었다는 평가다.
14개월간의 협상이 막을 내리는 기자회견장은 시들한 분위기였다. 혈전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회견이 싱겁게 끝나버린 것이다. 협상단도 지친 탓일까. 발표뒤 받아들인 질문은 4개. 7박 8일간 밤샘 취재에 시달린 기자들 가슴에 허무함이 밀려왔다. ‘질의응답 시간이 부족하다’며 기자들 항의가 이어졌다. ‘한·미경제동맹’이라 불린 FTA협상은 이렇게 끝났다.
한 일간지 기자는 “지난 3월 한 달간 쉼 없이 줄곧 뛰었다”면서 “한 달 사이에 두 살은 더 먹은 것 같다”고 FTA 취재의 고달픔을 우회적으로 쏟아냈다. 쉬는 날 없이 밤 낮 현장을 지켰던 2백여 ‘취재전사’들은 이제 각자 출입처로 흩어졌다. 하지만 취재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협정문 전문 확보를 위해 또 한 차례 경쟁을 벌여야 하는 까닭이다. 협상 분과 울타리 안에서 벌였던 취재전이 이젠 국회·청와대·경제 부처 출입기자까지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다.
성유창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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