男 1만5000여 명vs 女 296명…항일 ‘여성’ 독립운동가 전체 2% 불과해

[일요서울 | 강민정 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발굴하지 못하고 찾아내지 못한 독립운동의 역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특히 여성의 독립운동은 더 깊숙이 묻혀왔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가 지적했듯 당시 활동했던 항일 여성 독립운동가의 업적은 역사에서 지워진 경우가 대다수다. 여성 인권 감수성이 올라가면서 이들을 발굴·복원하고자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역할을 오래 전부터 묵묵히 지속해 온 이가 있다. 바로 항일여성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 김희선 회장이다. 김 회장을 일요서울이 지난달 21일 항일여성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김희선 회장 “당시 항일 여성 운동가 삶, 완전히 ‘독자적’”
항일 여성 독립운동가 ‘유관순’뿐? ‘NO’ 남자현·박차정 등 숨겨진 인물↑
“내가 이거(항일여성운동기념사업회) 5년 전에 할 때는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 운동을 한 여성을 발굴하는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김희선 회장이 기자를 보고 건넨 첫마디다.
그는 2014년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라는 이름으로 출범할 당시부터 쭉 수장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단체는 지난해 7월 사단법인으로 인정받았으며, 올해 3월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앞에 ‘항일’이라는 단어를 넣어 이를 강조한 이유에 대해 묻자 김 회장은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라고 하니 여성 문제를 다루는 이들이 여성이 독립하고자 하는 운동 단체인 줄 알더라”면서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여성 독립운동가’에 관한 개념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1949년부터 독립유공자를 대상으로 포상을 지급하기 시작한 이래 등록된 유공자의 수는 남성 1만5000여 명, 여성 296명이다. 이를 퍼센트로 환산하면 전체 중 여성 독립유공자는 2% 수준에 머무른다.
여태껏 이들에 대한 발견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이들의 희생을 단순한 ‘뒷바라지’ 또는 ‘옥바라지’ 정도로 경시한 인식 때문이기도 했다.
김 회장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는 독립 운동을 하다 감옥에 들어갈 경우 바깥에서 밥을 짓고 빨래를 해서 수감자에게 건네줘야 했다. 즉, 모든 가족이 독립 운동을 한 이에게 매달려 그를 보필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여성 독립운동가은 이 같은 숨은 노고를 통해 독립 운동에 기여했다는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를 두고 그저 ‘뒷바라지’로 여겨왔던 것이 지금까지의 세태라는 것이다.
김 회장은 “이들(여성 독립운동가)이 없었다면 어떻게 독립운동을 했겠느냐. 이러한 관점이 필요하다”면서 “당시 여성이 해 온 것에 관한 가치부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경문·전단지 배포…
‘옥바라지’ 전부 아냐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단순히 가사 노동만으로 독립 운동을 펼친 것은 아니다. 이보다 더욱 주체적이고 실질적인 방식으로 독립을 위해 애쓰기도 했다.
김 회장이 전한 사례에 의하면 당시 여성들은 독립 운동을 위해 전단지를 뿌리기도 하고, 밀정들을 놀라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너는 나쁜 짓을 했으니 언제 어떻게 죽는다’는 식의 경문(경고문)을 적어 그 집에 편지를 부치거나 포스터를 붙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군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도맡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남자들은 나가서 격투를 했지만 뒤에서 여성들의 보조가 있었기 때문에 독립 운동이 있었던 것”이라면서 “(당시) 항일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은 완전히 독자적”이라고 평가했다.
이어서 그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관한 일화를 잇따라 쏟아냈다. 이어지는 이야기들 속에서 항일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에 매진한 그의 관록이 엿보였다.
김 회장의 입을 통해 남자현, 이화림, 조마리아, 김 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 박차정, 오광심 등 독립을 위해 매진한 이들의 이름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여성 독립운동가 하면 ‘유관순’ 외 별다른 인물의 이름을 댈 수 없었던 기자에게는 참으로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이들 각자에 얽힌 배경을 이야기하면서 김 회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거나 눈물이 고이는 등 당시 시대적 배경에 절절하게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남자현 열사는 흰 수건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와 이를 위해 자른 자신의 손가락 두 마디를 동봉한 일화로 인해 ‘여자 안중근’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서로군정서 등에서 활약하고 총독 사이토 마코토 암살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933년 일본 장교 무토 노부요시를 살해할 목적으로 폭탄과 무기를 휴대하고 가던 중 체포돼 옥중에서 단식으로 항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화림의 경우 의열단에서 백범 김구 등과 8년 간 함께 활동하고 이봉창, 윤봉길 의사 의거를 돕는 등 독립 운동을 해왔다. 하지만 ‘백범일지’에는 한 줄도 실리지 않았다. 그가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박차정 의사는 독립운동가이자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의 아내로 영화 ‘암살’의 전지현의 실제 인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당시 조선에서 총기를 다룰 줄 아는 여성이 얼마 없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의열단에서 활동했다.
“아들아,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으라”는 명언을 남긴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인 조마리아와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벗어나기 위해 200여 쪽의 보고서 내용을 암기해 보고했다는 오광심 등 김 회장은 이들의 활약상을 활기차게 설명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오광심은 김 회장의 할머니이며, 오광심의 남편이자 김 회장의 할아버지는 광복군 제3지대장인 김학규라는 것.
김 회장은 당시 배화여자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항일 소녀’들을 소개하면서 “그때는 ‘만세’만 부르거나 태극기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가서 고문당하던 시기”라고 강조했다.
태극기가 곧 독립을 의미하던, 태극기만 품고 있어도 고문당하고 죽는 지금과 천차만별이던 시기라는 것이다. 그때 이 소녀들이 그것을 무릅쓰고 올라가 ‘만세’를 외쳤다는 것이 김 회장의 설명이다.
“역사 공부 통해서
신념·민족 자부심 생성”
김 회장은 역사의식을 후대에 심어주기 위한 과정에도 열심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보훈관과 역사의식에 관해 “아직 멀었다”고 안타깝게 말했다.
그는 “왜냐면 (우리가 학생들에게) 역사를 안 가르치지 않았느냐”면서 “자라나는 학생들이 역사에 대해 모르는 것은 어른들 책임이다. 얼마나 가르칠 게 많이 있느냐”고 역사의 중요성에 대해 피력했다.
이에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광복절인 지난달 15일 청소년을 대상으로 여성 독립운동가를 주제로 한 ‘빠른말(랩) 자랑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들이 역사에 즐겁게 배우고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김 회장은 “역사를 공부한다는 건 아이들이 신념이 생기고 똑똑해지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도 생긴다”고 역사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음은 항일여성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 사무실 외관에 걸렸던 독립 운동가들의 어록이다.
▲단재 신재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최초의 여성의병장 윤희순 지사 “여성들도 뭉쳐지면 나라찾기 운동이라 왜놈들도 잡는 것이니 힘을 모아 도와주세 우리 의병 만세로다!”
▲순국열사 김마리아 선생 “독립이 성취될때까지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
▲여성광복군 오광심 선생 “대한 여성의 피가 압록·두만간 연안에 흘러 민족의 독립과 여성평등의 열매를 맺자!”
강민정 기자 kmj@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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