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 김쌍수 부회장이 결국 물러났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CEO 자리에 오른지 3년만이다. 등장이 요란했던 탓인지 퇴장할 때도 온갖 소문들이 무성하다. 특히 그룹 측의 설명과는 달리 이번 인사가 실질적으로는 김 부회장의 ‘낙마(落馬)’가 아니냐는 주장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LG그룹 2인자로 불려왔던 김 부회장 입장에서는 달가울 리 없는 소문들이다. 이와 관련, 지난 19일에는 그동안 김 부회장의 마인드를 한 눈에 엿볼 수 있었던 홈페이지까지 폐쇄됐다. 한국 산업에 힘을 불어넣었던 ‘맹장’의 퇴장이 개운치 않은 뒤끝을 남기고 있다.
지는 해 ‘김쌍수’
LG그룹의 이번 연말인사는 ‘김쌍수의 퇴장, 남용의 등장’으로 요약된다. 김쌍수 부회장의 퇴진은 LG전자의 실적 부진으로 인해 오래전부터 예견돼왔다. 그러나 퇴진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가장 먼저 제기된 것이 영업이익 감소.
이는 LG그룹 전체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대부분 계열사의 순익감소가 예상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던 터라 ‘맏형’격인 LG전자가 어떤 식으로든 분위기 쇄신을 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나돌았다.
LG전자는 2004년 1조5,500억 원이었던 순이익이 2005년 7,000억원으로 감소했으며, 올해도 2,000억원 가량으로 줄어들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올해 초만해도 9만원대를 상회하던 주가도 5만6,500원(12월 19일 현재)까지 떨어졌고 시가총액도 11위에서 20위권까지 밀려났다.
때문에 재계 일각에서는 김 부회장이 실적부진에 따른 책임을 지고 연말 인사를 통해 물러날 것이라는 소문이 2~3개월전부터 나돌았다. 실제로 김 부회장은 이번 인사를 앞두고 1월로 예정됐던 외부 강연들을 돌연 취소하며 주변정리절차를 밟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퇴진 이유가 반드시 ‘실적부진’만은 아니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특히 LG그룹 내에서 김 부회장이 차지하는 위치를 고려한다면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는 LG그룹에서 구본준 LG필립스 부회장과 함께 2인자로 인정받아왔다. 구본준 부회장이 구본무 회장의 친동생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오직 실력으로 구 회장에게 인정받은 ‘실세’인 셈이다.
따라서 재계에서는 김 부회장을 ‘LG실세’, ‘왕의 남자’ 등으로 불렀었다. 이처럼 LG그룹 내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와 구본무 회장의 신임 탓에 실적부진으로 인한 퇴임설이 나돌 때도 주변에서는 ‘반신반의’했던 것이 사실. 결국 진짜 이유는 구본무 회장과 모종의 마찰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됐다.
김 부회장의 특이한 이력도 그의 거취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이유다. 김 부회장은 1969년 LG전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88년 이사로 선임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는 창원 등 ‘현장’에서만 근무했다. 35년 동안 오직 ‘현장밥’만을 먹으며 경력을 쌓은 셈이다.
그는 2001년 사장으로 승진한 뒤 2년만인 2003년 10월에 대표이사 겸 CEO로 취임했다. 당시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를 CEO에 발탁한 것은 ‘파격’ 그 자체였다. 또한 샐러리맨들에게는 ‘신화’같은 인물로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김 부회장의 리더십은 ‘불도저’로 정의됐다. 30여년을 창원공장에서 근로자와 함께하며 인정받은 추진력 탓이다. 특히 1980년대 중반 노사 분규 이후 매일 아침 회사 정문에 서서 근로자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던 것은 아직까지 회자되는 일화다.
김 부회장은 지난 10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항상 강조하는 빠른실행(Fast Execution)이 아직 만족할 만큼은 아니지만 이뤄지고 있는 것도 크게 달라진 점이라고 생각한다”며 재임기간 동안의 업적을 자평했다. 김 부회장의 홈페이지는 인사발표를 즈음하여 폐쇄됐다.
김 부회장은 앞으로 (주)LG로 옮겨 그룹전체의 전략사업 등을 구상한다. 외형상으로는 그룹전체의 비전을 제시해야하는 자리일지 몰라도 ‘현장맨’인 그에게는 어딘지 모를 어색함이 느껴지는 자리인 것만은 분명하다.
뜨는 해 ‘남용’
김 부회장의 뒤를 이어 실적부진을 만회할 구원투수로는 남용 전 LG텔레콤 사장이 발탁됐다. 김 부회장이 ‘현장전문가’라면 남 부회장은 그룹의 ‘전략통’이다. LG그룹의 경영혁신추진본부에서 상무부터 부사장을 지냈으며, 구조조정본부 부사장도 역임했다. 특히 구자경 명예회장의 비서실장을 오랫동안 맡으면서 든든한 신임을 쌓았다.
물론 시장에서의 능력도 이미 검증받았다. 지난 1998년부터 LG텔레콤의 CEO를 맡은 남 부회장은 이동통신사업에서 타 통신사와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최근 700만 가입자를 돌파하는 성과를 세웠다. 올해만 47만명의 가입자가 늘어났다. 이같이 치열한 이통사업 시장에서 나름대로의 비약적 성과를 거뒀다는 것이 이번 인사에서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LG텔레콤 관계자는 “남용 부회장은 결론이 날 때까지 회의를 계속하는 ‘끝장 회의’로 유명하며 가슴이 답답해올 정도로 높은 목표치를 제시하고 강하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라며 남 부회장에 대해 설명했다.
물론 남 부회장에게 지워진 책임은 막중하다. 당장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휴대폰과 디스플레이 부문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한다. 특히 휴대폰 실적이 그의 성패를 좌우할 전망. 그동안 LG전자는 휴대폰 실적에 따라 크게 요동쳤다. 따라서 휴대폰 매출 상승이 그가 통과해야할 첫 번째 시험대인 셈.
한편 여의도 증권시장에서는 CEO교체에 따른 기대 탓인지 LG전자의 주가가 인사이후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 LG인사, 분위기 쇄신 흔적 역력
LG그룹의 인사에서는 이번에도 ‘파격’ 발탁이 여럿 눈에 띈다. LG전자 부사장으로 승진한 조성진(50) 세탁기사업부장은 고졸 출신이다.
LG에서 고졸 출신이 부사장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용산공고를 나온 조 부사장은 1976년 산학우수 장학생으로 금성사(옛 LG전자)에 입사한 뒤 30여년 동안 줄곧 세탁기만 연구했다. 99년 세탁통에 직접 연결된 모터로 작동되는 ‘다이렉트 드라이브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에 성공, 원가를 60%나 절감하고 진동과 소음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부진탈출을 위한 LG그룹의 몸부림은 이번에 새로 임명된 외국인 임원에서도 엿볼 수 있다. LG 미국 법인의 존 헤링턴, 프랑스 법인의 에릭 서데이 등 해외 법인 마케팅 책임자와 MC 유럽팀장인 도미니크 오 등이 그 주인공.
해외법인에서 외국인 임원을 영입한 적은 있지만 현지 채용 간부 직원을 임원으로 승진시킨 일은 LG에서 처음이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친동생인 구본준 부회장의 이동도 눈에 띈다. LG필립스LCD는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7,020억원의 적자를 냈다. 이 때문에 구본준 부회장의 이동도 결국 낙마 아니냐는 의혹을 자아내고 있다.
LG그룹은 이번 인사를 통해 부진탈출을 위한 승부수를 띄웠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2007년 한 해는 LG에 ‘도약’이냐 ‘후퇴’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한해가 될 전망이다.
한편 이번 LG그룹의 대폭적인 물갈이가 아직까지 인사문제를 매듭짓지 않은 삼성, 현대, SK 등 주요 대기업들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지 연말 재계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키워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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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진 phj1977@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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