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은 집권 1년간 ‘뼈저린 경험’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당연히 누렸던 많은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권위주의’ 해소를 위해 노력했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을 온갖 중상모략과 냉소뿐이었다. 조·중·동 보수 언론과 이른바 ‘주류’에 둘러싸인 노 대통령에게는 세상에 대한 ‘인식’ 자체가 흔들렸던 것이다. 그로서는 ‘총선 올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작년과 같은 상황이 되풀이된다면 그는 차라리 “대통령을 그만두는 것이 더 낫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안이 부결된 이후 본인이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어떻게 잡아 나갈 것인가를 놓고 여러 각도에서 의견을 수렴하고 있는데, 총선 직후 김혁규 전 경남지사를 비롯해 김원기 의원 등을 청와대로 불러 의견을 교환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고 한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내부 파열음이 흘러나오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정동영 의장 등 지도부를 비롯해 김원기, 김혁규씨 등 당내 원로급 인사들이 중심을 잡아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총선 이후 노 대통령의 행보 중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열린우리당 중진 정치인들을 다양하게 만나고 있다는 점이다. 주요 인사는 청와대로 직접 불러 독대를 한다.이에 대해 총선을 통해 성장한 정동영 의장에 대한 본격적인 견제가 시작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를 의식해서 정동영 의장도 앞으로 대선 레이스까지 4년이나 남은 기간에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의장직을 그만두고 행정 경험을 쌓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김혁규 전경남지사는 “우리당 내부에는 스타 기질이 많은 의원들이 워낙 많고, 이들이 우쭐하는 마음에 청와대나 참여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개인 의견을 강조해 여권 내부의 혼선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이런 현상을 대통령이 잘 단속해줘야 한다”고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과거 정권과 달리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직접 당을 통제할 수 없다는 데 노 대통령의 고민이 있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당에 입당해도 당 총재 등의 당직을 맡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각과의 당정 협조를 통해 나름대로 우리당을 통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새로 ‘문희상 역할론’이 증폭되고 있다. 당과 청와대 사이를 연결하는 ‘정치적 채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희상 전비서실장이 청와대를 나오면서 “당과 청와대의 가교 역할을 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어 그를 위해 새로이 정무장관 자리까지 생긴다는 추측도 있다. 그리고 6선의 김원기 의원이 17대 국회의장이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청와대 관계자는 “여권 내 역할 분담은 이 전제 위에서 출발한다”고 밝혔다. 현 고건 총리는 스스로 사임을 주장하고 있으나 국정 전반이 최악의 위기 상황에서 책임감이 강한 그가 쉽게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는 못할 전망이다.
노 대통령 입장에서도 행정능력이 검증되어 있고, 또 누구보다 자신에게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은 고건 총리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있다는 후문이다. 정동영 의장에 대한 견제는 ‘노무현 2기 국정’의 핵심 화두이다. 이런 미묘한 권력 관계를 반증이라도 하듯 노 대통령은 4월 21일 우리당 지도부 전체를 만나기 전에 김근태 원내 대표를 독대했다. 김 원내대표와 노 대통령 사이에는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적지 않은 앙금이 있었다. 그것이 이번 독대에서 깨끗이 풀렸다고 한다.청와대 독대에서 우리당의 총선승리를 자축하는 의미에서 술잔이 몇 순배 돌았다. 노 대통령은 감격스런 표정으로 김 원내대표와 뜨거운 포옹을 하기도 했다. 김 원내대표 입장에선,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는 대목이다.
차기 대권을 꿈꾸는 김 원내대표로선 앙금이 남아있던 노 대통령과의 관계를 최상의 상태로 복원한 것 자체가 큰 소득인 셈이다. 이에 대해 열린우리당 고위 관계자는 “청와대 독대 후 김근태 원내대표의 위상이 급격히 강화됐다”며 “정동영 대항마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 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당내 일각에선 총선 이후 노 대통령이 김 원내대표에게 부쩍 힘을 실어주는 것도 바로 ‘대항마’로 활용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김 원내대표가 ‘정동영 대항마’로서 자리잡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당장 다음 달 초 실시되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천정배 의원과의 전투가 기다리고 있다. 정동영 의장이 사퇴할 것이 거의 확실한 상태에서 원내 정책 정당화로 권력의 축이 급격하게 변하고, 따라서 원내 대표에게 힘이 쏠리게 되어 있다. 이 상태에서 정 의장을 대신하여 천정배 의원이 나설 경우, 열린우리당 내부의 양 축 간의 대대적인 헤게모니 싸움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
즉, 김근태 원내대표는 이해찬, 임채정 의원 등 중진과 재야그룹, 그리고 이번에 무더기로 국회에 들어온 운동권과 노동운동 출신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반면 천정배 의원은 당내 실세인 천신정(천정배, 신기남, 정동영)의 일원이자 그들 주도로 영입한 관료나 기업인 출신 등 전문가 그룹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모든 경우에서 점점 노무현 대통령 친정 체제와 권력집중 현상은 기정사실화될 것 같다. 작년 참여정부에서 노 대통령의 권위는 당 내외에서 땅에 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노 대통령이 그런 시행착오 끝에 효과적인 개혁을 위해서도 먼저 당내 권위 회복이 급선무라는 인식에 도달했다는 후문이다. 노 대통령이 이제 ‘총선 올인’에서 ‘전방위적 개혁 올인’으로 입장이 바뀌고 있다.
이상봉 pneuma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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