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일씨는, 이미 작고했지만, 생전에도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른 모습이었는데, 방송에서 보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말투는 약간 더듬는 듯했지만 매사에 진지했다. 정 회장은 정주일씨와 매우 돈독한 사이인 듯했다. 회의석상에서부터 이어진 두 사람의 대화는 한시간이 넘도록 계속됐다.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얼핏 들어보니 전날 저녁 여의도 정가에서 있었던 얘기를 주고받는 듯했다.그러다 정씨는 기자에게 불쑥 이렇게 질문했다.“기자 양반, 국민당 잘 될 것 같지 않아요?”“…”갑작스런 질문에 기자가 잠시 멈칫 하자 그는,“회장님 지지율도 계속 상승중이니 잘 될 겁니다. 언론에서 좀더 지원해주면 더욱 좋구요.”그는 꽤 고무되어 있는 표정이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정 회장도 입가에 웃음기를 멈금고 있었다. 사실 그 때 기자가 본 정 회장의 모습은 매우 만족스러워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재벌그룹의 총수로서 만족하지 못하고 정치에 뛰어든 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우려했다.
그의 정치 도전은 한국 정치사에서 드문 일이었고, 앞날도 불투명했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 정 회장의 표정이나 분위기는 정치에 입문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 모습이었다.갑자기 기자는 그런 부분이 궁금했다.“회장님, 정치에 입문하실 때 만류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기자의 질문에 정 회장은 무슨 뚱딴지 같은 질문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잠시 기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기자가 머쓱해 하자 그는 정주일씨를 한번 힐끗 바라본 뒤 답했다.“반대도 있었지. 동생들도 반대했지.”“정치에 입문하신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으시는지요.”“난, 지금까지 기업을 하면서 숱한 도전과 시련을 맛보았지. 어떤 때는 목숨이 위태롭다고 느껴지던 때도 있었고… 하지만 정치는 기업을 경영하는 것 보다는 쉽다는 생각이 드네. 국민을 생각하고,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해결해주는 일에만 몰두하면 되는 것 아닌가?”정 회장의 논리는 매우 단순했다.
그의 정치론은 학교 강의실에서나 들을 수 있는 원론적인 것이었다. 그의 논리는 지나치게 경영학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예를 들면 얼마를 투자하면, 얼마의 수익이 예상된다는 계량적인 측면에서 정치를 바라보고 접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 회장은 정치라는 것이 살아움직이는 생물과 같다는 점과 보이지는 않지만 거대한 유기체처럼 정치현상이 모습을 바꾸어간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겼다. 사실 정치는 끝없이 모습을 바꾸는 카멜레온과 같다. 권력의 근원이랄 수 있는 여론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아침과 저녁이 다르다. 민심이라는 것은 국민 각자의 이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규격화되거나 정형화된 틀을 가지고 정치를 재단할 수 없다고 기자는 강의실에서 들었다. 정 회장은 그런 기자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렸다. 정 회장의 접근방법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었다.
‘배 고프면 먹어야 하고 아프면 병원을 가야 한다’는 논리였다. 다른 변칙적인 방법이나 우회적인 수단을 그는 용납하지 않는 듯했다. 그에게서 느낀 점은 모든 현상들을 슬림화시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언젠가 그는 서해안 간척지사업을 하던 중 썰물로 인해 공사의 진척이 없자 거대한 유조선을 가라앉혀 바닷물을 막은 적이 있다. 그의 논리는 마치 콜럼버스 달걀세우기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원칙주의자’라는 말이 새삼 기자의 뇌리를 스쳐갔다.“머리가 좋다는 것은 복잡하다는 것이지. 하지만 세상사는 머리로 할 때도 있고, 가슴으로 할 때도 있다고 보네. 어떤 이는 날보고 아이큐가 낮다고 비웃지만, 또다른 이는 내가 머리가 너무 좋다고들 하지. 그것이 왜 그런지 아나? 나를 모르기 때문이야. 난 그저 모든 문제를 원칙에 맞춰 해결하면 해법을 찾지 못하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믿는 사람이네. 우리 그룹에도 나보다 많이 배우고 나보다 똑똑한 사람이 99%일세.
그런데도 왜 내가 그룹회장이었을까. 난 그 사람들보다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네. 하지만 99%의 직원들은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에 부닥치면 누구를 찾는지 아나? 바로 날세. 내가 해법을 제시해주길 바라고 있는 것이지. 그것이 내가 현대그룹의 총수자리를 지켜온 근거일세.”기자는 한참 동안 그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알듯 하면서도 딱히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에 가위눌림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기자는 생각했다.“바로 이것이구나! 정주영이라는 한 자연인이 한국 최고의 재벌 현대그룹을 일궈낸 힘이 바로 이것이구나.”정주영 회장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위대하지만, 평범한, 그리고 평범하지만 비범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와 시간을 보내기 전까지 가지고 있던 정주영 회장에 대한 선입견이 기자 자신도 모르게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기자는 정주영 회장의 길고긴 얘기에 빠져들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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