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 댁의 아침식사는 아침 5시반쯤 시작됐다. 둥근 식탁에 아들들이 먼저 자기자리를 찾아 앉았다. 자연스럽게 자리를 찾는 걸로 보아 매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했다. 벽쪽 가운데 자리는 정 회장이 앉았고, 오른편에 몽구씨가, 왼편에는 몽헌씨가 앉았다. 몽구씨 옆자리에는 몽윤씨가 앉았고, 그 옆에 몽근씨가 앉았다. 몽헌씨 옆쪽에는 몽준씨가 앉았다. 기자는 정 회장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기자가 자리를 차지하는 바람에 평소 식탁에 함께 앉아 식사를 해온 듯한 중년의 남자(정 회장의 비서인 듯했다)는 아래층에서 식사를 하게 됐다.정주영 회장의 아침식사는 매우 검소해 보였다. 흔히 재벌회장, 그것도 한국 최대 재벌그룹의 회장이니 아침 식단이 ‘상다리가 부러질’ 진수성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적어도 정 회장의 식탁에서 만큼은 예상이 빗나갔다. 물론 음식은 매우 정갈하고 깨끗했다.
반찬은 7~8가지였는데, 기억해보면 대부분 나물이나 채소류였다. 눈길을 끈 것은 미역국이었다. 기자는 국을 순식간에 두 그릇이나 비울 정도로 국물맛이 일품이었다. 기자가 국을 더 달라고 청하자 변중석 여사가 흐뭇한 듯 미소를 지으며 한그릇 가득 더 내놓았다. 맞은편에서 식사를 하던 정 회장이 “우리집 국맛이 좋지?”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정 회장은 당시 70대에 접어든 나이였지만 식사량은 적은 편이 아니었다. 국 한그릇을 너끈히 비운 정 회장은 주로 나물류를 많이 찾았다.식사를 하는 동안 정 회장은 말이 없었지만 아들들은 소란스러울 정도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몽구씨와 몽헌씨는 주로 듣는 편이었고, 몽준씨는 회사 얘기를 많이 했다. 가까이서 본 몽준씨에 대한 인상은 무척 밝은 편이란 점이었다.
아침이라서인지 몽준씨는 혀 짧은 말투였는데, 머리가 상당히 좋다는 느낌을 받았다. 몽구씨는 별로 말은 없었지만 이따금씩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물어보자 정 회장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기도 했다. 형제들은 대화를 나누다가도 정 회장과 몽구씨가 무슨 말을 할 때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몽근씨였다. 그는 성격이 매우 급한 듯 국에 밥을 말고는 한 입에 후르륵 마셔버렸다. 이 모습을 보던 몽구씨가 “체한다 체해, 성질 하군…”하면서 눈을 살짝 흘겼다.정 회장 일가의 식사시간은 대략 40분쯤 걸렸다. 정 회장은 가장 먼저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 외출준비를 했다. 정 회장이 식사를 마치자 아래층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가족들과 수행비서들이 우르르하고 2층으로 몰려 올라왔다. 비서들이 정 회장의 침실 앞에 도열하듯 서 있었고, 변중석 여사와 며느리들이 방안으로 들어갔다. 넥타이담당은 변 여사였다. 변 여사는 붉은색 넥타이를 골랐다.
그러자 정 회장이 “너무 젊은 것 아냐?”하며 살짝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변 여사는 “아직은 청춘 아니유”하면서 정 회장의 반응은 아랑곳 없다는 듯 찬찬히 매어주었다. 변 여사의 뒤편에 양복 윗도리를 들고 있었던 사람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둘째 며느리인 이정화씨(몽구씨 부인)였던 것 같다.정 회장이 옷을 입는데 걸린 시간은 10여분이나 걸렸다. 그 날은 제법 유세일정이 빡빡했다. 제주도에서 열리는 도민축제 행사에도 참가하기로 했기 때문에 적어도 정 회장이 청운동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시간은 밤 늦은 시간일 것으로 예상됐다.정 회장이 먼저 대문을 나섰고, 그 뒤를 자녀들이 뒤따랐다. 집 앞에는 국민당 당직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청운동에서 광화문 국민당사까지는 3~4킬로미터 정도됐다.
어슴푸레한 새벽길을 나서는 남편의 모습이 안스러운지 부인 변중석 여사는 정 회장의 모습이 골목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대문앞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골목길을 내려오면서 벌어진 장면.정 회장의 청운동 자택은 청와대 옆길에서 인왕산쪽으로 100여미터 올라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행길까지 나오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더욱이나 꼬불꼬불한 주택 골목길을 내려와야 했다. 일행은 정 회장이 맨 앞에서 걸어가고 아들들과 국민당 직원 10여명이 그 뒤를 따라갔다. 행렬은 꽤 길어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쿵탕 하는 소리가 났다. 행렬의 맨 뒤에서 따라가던 기자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주택 앞에 놓여 있던 철제 쓰레기통이 넘어지는 소리였다. 쓰레기통은 누군가 발길로 차 넘어졌고, 쓰레기가 골목길에 쏟아졌다. 쓰레기통을 발길로 찬 사람은 정 회장의 2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장난기가 발동해 찬 것이었지만 모양새는 그리 좋지 않았다.
기자가 그 모습을 쳐다보자 뒤따르던 국민당 직원인 듯한 젊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얼른 쓰레기를 주워 담았다.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습던지 기자는 ‘푹’하고 입을 가린 채 웃었다. 쓰레기통을 발로 걷어찬 주인공은 현재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이끌고 있는 점잖은 재벌총수가 되어 있다.70대의 노인이라고 하기엔 정 회장의 건강은 대단했다. 그는 청와대길을 지나 광화문을 거쳐 국민당 당사까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걸어갔다. 이른 아침이라 거리는 한산했다. 국민당 홍보담당 관계자는 정 회장의 건강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격찬했다. 아마 선거를 앞두고 정 회장의 건강에 대한 말들이 오가는 것을 의식한 듯했다. 실제로 당시 정 회장의 건강은 좋아보였다. 30대 초반의 젊은 기자도 아침행군이 숨찼는데, 그는 끄덕없어 보였다. 걸으면서도 그는 잠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뒤따르던 참모들이 숨을 헐떡거리자 “젊은 사람이 뭘 헐떡거려”하면서 핀잔을 주었다. 광화문 국민당사에 도착하자 기자의 등짝에는 땀이 흥건히 배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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