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실크천으로 덮여진 정주영 회장 침실
흰색 실크천으로 덮여진 정주영 회장 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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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5-07-19 09:00
  • 승인 2005.07.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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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0월 무렵. 기자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만 하루를 함께 지냈다. 당시 기자는 경향신문 기자로 재직하고 있었다. 정주영 회장과 하루를 보내게 된 이유는 그해 12월에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에 그가 출마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앞서 그는 국민당을 만들었다. 그는 ‘국민당 대통령 후보’ 자격으로 기자와 하루를 보냈다.기자가 정주영 회장의 청운동 자택을 찾아간 것은 새벽 4시경이었다. 당시 국민당 비서실장을 맡고 있던 이병규 실장이 “아침 일찍부터 유세일정이 잡혀 있으니 새벽 4시쯤 와 줬으면 좋겠다”고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정 회장의 청운동 집은 2층 슬라브집이었다. 300여평의 넓은 부지에 널찍한 잔디마당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집 전체에서 풍기는 첫 인상은 화려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으레 재벌총수, 그것도 한국 최고의 재벌총수 집이라면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정 회장의 청운동 자택에서는 그러한 인상은 없었다.기자가 마당에 들어섰을 때 비서로 보이는 두 사람이 나와 마중을 해 주었다. 이른 새벽임에도 벌써 1층 거실에는 10여명의 여인네들이 와글거렸다. 똑딱거리는 칼질소리와 부글대는 국끓는 소리, 부산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에서 기자가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하루일정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거실에 들어서자 국민당 간부로 보이는 정장차림의 늙수그레한 서너명의 인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인사를 건넸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인사들 중에는 탤런트인 최불암씨도 있었다. 기자로서는 그런 유명 인사를 직접 만나게 됐으니 여간 영광이 아니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변중석 여사였다. 변 여사는 음식장만을 하기 위해 부엌 한가운데 쪼그리고 앉아 있던 10여명의 여자들 사이에 함께 있었다. 그녀는 기자가 온 것을 알고는 사람들 틈에서 걸어나와 아직 채 물기가 마르지 않은 손으로 “잘 오셨다”며 환한 미소로 반겨주었다. 처음 만난 변 여사의 모습은 정겨운 할머니 같았다. 그녀는 기자를 거실 중앙에 있는 소파로 안내해 앉힌 다음, 나이는 몇 살인지, 결혼은 했는지 등 개인적인 부분을 물어보았다. 새벽부터 남편을 취재하러온 기자의 피곤함을 달래려는 의도인 듯했다. 그녀의 정겨움에서 문득 느껴진 것은 남편이 현대그룹을 이끌면서 수십만명의 직원을 건사하는 동안 그녀가 어떻게 ‘안방경영’을 해왔는지 엿보게 하는 부분이었다.변 여사는 직접 기자의 손을 붙들고 정 회장이 아직 잠들어 있는 2층으로 데리고 갔다. 머쓱하게 변 여사의 손에 이끌려 2층 계단을 오르자 그곳에도 1층 거실 만큼 널찍한 공간이 있었다.

얼핏 보기에 사방은 통유리창으로 확 트여 있었고, 거실 한켠에는 정 회장이 기거하는 방이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정 회장은 일어나지 않은 듯 방문은 닫혀 있었다. 2층 거실 중앙에는 10여명이 같이 앉아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인 둥근 원형식탁이 놓여 있었다. 식탁에는 벌써 여러 사람이 둘러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기자를 데리고 온 변 여사는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에게 “회장님 취재온 기자래요. 인사하지 그래”하고 말하고는 다시 1층으로 돌아갔다.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정 회장의 아들들이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정몽윤 현대해상보험 회장, 정몽일 현대기업금융 회장 등이었다. 기자는 말로만 들어온 정 회장의 2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영광을 가졌다. 인사를 나누고 몇마디 말을 건네고 있을 즈음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이 2층으로 올라왔다. 조금 늦은 모양이었다. 정 고문은 “아이고 제가 좀 늦었네”하며 소탈한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자기 자리를 찾는 것으로 미뤄 거의 매일 아침이 이런 풍경속에서 이뤄지는 듯했다.

그러고 있을 즈음 정몽구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께서 기침하신 듯한데…”하며 정 회장의 침실로 들어갔다. 이어 다른 아들들도 한 사람씩 정 회장의 방으로 뒤따랐다. 기자는 호기심에 맨 마지막으로 방에 들어섰다. 아들들은 도열하듯 정 회장의 침대 맞은편에 일렬로 선 채 동시에 꾸벅 절을 올렸다. 정 회장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아들들의 얼굴을 일일이 쳐다보며 눈을 맞추었다.정 회장의 침실은 40~50평쯤 되어보였다. 눈길을 끈 것은 방안이 온통 하얀 천으로 덮여 있는 점이었다. 바닥은 붉은 무늬가 들어간 검정색 카펫으로 깔려있었는데 하얀 실크천이 침대와 방바닥 전체를 덮고 있어 마치 눈이 내린 듯했다. 기자가 궁금한 듯 방안을 둘러보자 옆자리에 서 있던 누군가가 “먼지 알레르기가 있으셔서 실크천을 덮어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잠시 아들들의 얼굴을 확인하던 정 회장이 기자를 보자 ‘누구냐’는 듯 눈길을 멈추었다. 그 때 뒤에 서 있던 비서가 “취재차 온 기자분”이라고 말했다. 정 회장은 “어이쿠 잠자리까지 취재해…”하면서 파안대소하고는 얼른 일어나 세면장으로 향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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