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장은 ‘돈 되는 사업이면 무엇이든 한다’는 뉘앙스를 주었고, 정 회장은 ‘작은 것은 버리고 큰 것을 노린다’는 일종의 ‘대박정신’이 담겨 있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돈을 추구한다는 점은 공통적이었다.두 사람이 사업을 시작하기 전 행보를 보면 이병철 회장이 의령에서 서당을 마치고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서울의 중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정 회장은 강원도 통천 아산마을에서 화전을 일구고 있었다. 이 회장이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세워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정 회장은 서울과 인천의 채석장, 부두 노역을 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부분은 두 사람 모두 첫 사업이 정미업이었다는 점이다. 이 회장은 1936년 협동정미소를 세웠고, 정 회장은 1938년 경일상회를 설립했다. 이는 당시 가장 이문이 많이 남고 이윤보장이 됐던 사업이 먹고사는 사업 중 하나인 정미업이 아니었느냐는 추측을 낳게 한다.
어쨌든 이병철 회장이 정주영 회장보다는 2년 정도 먼저 사업을 시작했다. 정미업에서 시작된 이들의 사업이력은 이 회장이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정 회장은 자동차수리업인 아도서비스를 차리면서 시작됐다. 눈여겨 볼 점은 삼성상회는 지금의 종합상사처럼 물건을 매입한 뒤 소비자들에게 파는 유통전문이었고, 아도서비스는 사실상 제조업에 가까운 것이었다. 결국 이같은 사업분야의 차이는 나중에 삼성그룹과 현대그룹의 이미지가 달라지는 출발점이 되었다. 실제로 대구에서 10년간 사업을 하던 이 회장은 1948년 서울로 올라와 삼성물산을 차리면서 종합상사를 바탕으로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을 연이어 설립하면서 부를 키워나갔고, 정 회장은 해방 직후인 1946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해 자동차 제조에 발을 내디딘 뒤 현대건설, 현대상선, 현대중공업 등을 만들었다.두 사람이 재벌의 반열에 오른 시기를 보면 이병철 회장이 훨씬 앞선다. 이 회장은 사업운이 유난히 좋은 편이었다.
삼성물산이 서울에 사무실을 차린 직후 6·25전쟁이 터지면서 각종 물품들이 날개돋친 듯이 팔려나가 돈방석에 앉았다. 전쟁이 끝나가던 무렵 제일제당을 세우면서 설탕, 밀가루 등 식품사업을 전개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것도 그의 사업운이었다.그러나 정 회장은 초기에는 그리 운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정 회장은 현대자동차를 세웠지만 처음에는 주목받지 못했다. 다만 6·25전쟁이 터지던 해에 설립한 현대건설이 전쟁통에 위험을 많이 겪으면서 근근히 버티다가 전쟁복구사업과 미군기지 건설업을 따내면서 떼돈을 벌었다. 정 회장은 몸고생 끝에 부를 거머쥔 셈이었다.이병철 회장은 사업을 키워나가는 과정에 유능한 인재들을 중심으로 회사를 구축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반면 정 회장은 가족 중심으로 회사 경영을 이끌어나갔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 모두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경영진의 성격 차이는 나중에 회사의 위상 부분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그 차이는 삼성그룹이 ‘인재제일’이라는 사시를 택하게 한 반면 현대그룹은 ‘인화’를 사시로 내세우게 했다. 가족 중심 경영이라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정 회장은 ‘친애’를 사시의 하나로 정했다. 정 회장이 친애를 사시로 정한 것은 회사경영에 거의 모든 형제들이 초기부터 가담한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이런 경영인 구성의 차이는 나중에 삼성이나 현대에 모두 적잖은 후유증을 낳았다. 삼성은 초기에 사업참여를 했던 조홍제 효성그룹 회장과 그리 밝지 않은 모습으로 헤어지는 결과를 가져왔고, 현대그룹은 형제간 및 후세간에 사업을 분리하는 과정에서 잡음을 낳았다. 비록 그룹의 대권은 정 회장이나 이 회장 모두 2세들에게 넘기긴 했지만 가족위주의 경영인 구성이었던 현대보다는 전문경영인 위주의 삼성이 내부잡음면에서는 다소 덜했던 편이다.
그렇다고 삼성이 무리없이 경영권 승계를 한 것은 아니었다. 삼성에서는 경영에 참여했던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2세인 맹희, 창희, 건희 등 세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도 없지는 않았다. 나중에 다시한번 짚어보겠지만 사카린밀수사건과 같은 큰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 후유증이 가족간 갈등으로 번지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현대그룹의 경우에는 정 회장이 생존했을 당시에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작고한 후 여러 가지 문제를 낳았다. 현대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의 분리과정도 그리 원만치 못했고, 현대그룹과 정 회장의 동생인 정상영 KCC 회장이 이끄는 KCC그룹과의 경영권 마찰문제도 가족경영의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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