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사람] <10> “코딱지 친구들~ 잘 있었어요?”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
[그때 그사람] <10> “코딱지 친구들~ 잘 있었어요?”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
  • 강민정 기자
  • 입력 2018-08-27 18:00
  • 승인 2018.08.27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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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MBC ‘마리텔’ 출연으로 다시 '힐링 멘토'로 떠오른 '갓영만'
[일요서울]이 만나본 언제나 '영맨(youngman)'인 김영만 씨.
[일요서울 | 강민정 기자] 2015년 인터넷에 “코딱지 친구들~”이라는 친근한 별명 하나가 새롭게 등장했다. 이미 훌쩍 커버린 2030세대에게 다시금 살갑게 인사를 건넨 건 ‘종이접기 아저씨’로 유명한 김영만 씨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기다리거나 출근길을 배웅할 때 브라운관 속에는 늘 그가 있었다.

팍팍한 세상살이에 지친 우리에게 동심을 일깨워주며 멘토로 자리 잡은 그를 충남 천안 ‘아트오뜨’에서 [일요서울]이 만났다.

“이제 잘 할 거예요. 어른이잖아요.” 지친 청춘에게 건넨 위로에 ‘반응 폭발’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것, 격려해준 2030세대 덕분…여러분 잘 컸어요”


종이접기 아저씨를 만난 건 매미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던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지금은 태풍 ‘솔릭’이 더위를 한 풀 누그러뜨렸지만, 당시는 한여름 폭염이 채 가시지 않은 때였다. 김 씨의 작업실인 ‘아트오뜨’ 정원에는 무성한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자 “강의가 없을 땐 여기 내려와 (종이접기) 연구하면서 지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하는 일 중) 제일 중요한 건 풀 뽑기”라며 농담을 건넸다.

아트오뜨는 당초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체험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하지만 현재는 운영하지 않고 있다. 김 씨가 외부 강의로 바빠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김 씨는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하 마리텔)’이 뜨는 바람에 외부 강의 섭외가 많이 들어왔다. (아트오뜨는) 너무 힘들어서 잠시 문을 닫았다”면서 “대학 강의도 나가고 있고, 유치원·어린이집이나 청·장년 대상 토크 콘서트, 복지관 등 다양한 곳에서 강의하고 있다”고 안부를 전했다.

어느덧 68세의 접어든 나이에 꽉 찬 일정이 벅찰 법도 한데 그런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많이 바쁘시겠다고 말을 건네니 “불러줘서 고마울 따름”이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김 씨의 말마따나 2030세대가 다시 그를 떠올리게 된 계기는 2015년 방영된 MBC 예능 프로그램 ‘마리텔’이었다. 

당시 그의 출연은 ‘검실 1위’를 기록할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왔다. 사실 ‘실시간 검색어 1위’라는 뜻의 ‘실검 1위’가 돼야 하지만 예상보다 폭발적인 반응에 작가가 금한 마음에 ‘검실 1위’라고 잘못 표기하는 해프닝으로 만들어진 단어다.

김 씨는 “나는 교양 프로그램만 출연했었지 예능 프로그램은 출연 안 했었다. 그래서 섭외 전화가 왔을 당시에는 (출연) 못한다고 했다”면서 “2030세대가 보는 프로그램인데 유아용 종이접기를 들고 나가서 하면 과연 누가 보겠느냐”고 당시 가졌던 우려를 설명했다.

하지만 MBC 마리텔 측의 ‘삼고초려’ 끝에 ‘나를 생각하고 의뢰했으니 나를 필요로 한 것 아니겠느냐. 불러줄 때 가자’고 마음먹은 뒤 종이접기 가방 하나만 덜렁 든 채 방송국에 갔다고 말했다. 촬영 전까지만 해도 ‘5등할 계산’을 하고 간 그였지만, 반응은 180도 달랐다.

김 씨는 웃으면서 “아이들 대상이라 생각하고 ‘코딱지들아 잘 있었니~ 그동안 뭐하고 있었니. 녀석들 많이 컸네’하고 모니터를 봤는데 ‘유(ㅠ)’가 계속 올라오더라”고 첫 촬영 현장 상황을 전했다. 여기서 'ㅠ'는 눈물을 뜻하는 이모티콘이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던 김 씨가 작가에게 ‘모니터가 망가진 것 같다’고 하니 ‘선생님, 이거 우는 거예요’라는 대답이 돌아와 “너희들 왜 우니”가 절로 튀어나왔다고 한다. 김 씨는 “정말 웃겼다”면서 당시 소감을 말했다.

계속해서 그는 “그 뒤로 (방송을 보는 이들이) ‘선생님, 어디 가 계셨어요?’ 이러는데, 나는 ‘TV유치원 하나둘셋’ ‘혼자서도 잘해요’ ‘딩동댕 유치원’ ‘대교방송 김영만의 미술나라’ ‘보니하니’ 등 계속 (종이접기 프로그램을) 녹화했다. 그 사이에 이 녀석들이 다 커버린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렇다. 2030세대는 이미 다 자라 어린이 프로를 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출연이 더욱 각별했을 거다. 외줄타기처럼 울렁이는 세상을 살고 있었는데 어린 시절 추억을 함께한 종이접기 선생님이 등장한 것이니까.

때문에 당초 5등을 할 것이라는 걱정과 달리 그는 삽시간에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며 큰 관심을 받았다.

김 씨는 계속해서 ‘마리텔’ 당시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그는 “(네티즌이) ‘종이접기 어려워요’라고 해 ‘어려우면 엄마한테 도와달라고 하세요’ 하니 ‘내가 엄마예요’ ‘우리 엄마 환갑이에요’(라고 대답)하더라”면서 “‘환갑인 엄마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그 엄마가 얼마나 좋아하겠니. 이 코딱지들아!’ 했더니 이게 어록이 된 거다”고 말했다.

실제 그의 출연 이후 ‘잘 할 거예요. 이제 어른이잖아요’ 등 그가 방송 중에 했던 말들이 ‘김영만 어록’으로 만들어져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했다.

2030세대가 그의 말 하나하나에 감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 씨는 이 질문에 “2030세대들이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고 운을 뗐다.

1997년 IMF로 미술학원·피아노학원·태권도학원 등을 그만두며 문화 향유가 어려웠던 당시, 주입식 위주의 우리나라 교육 제도, 취업난, 취업 후 이어지는 심리적 불안과 고된 밤샘 노동 등 여러 가지 고충이 이들에게 있었다는 것.

김 씨는 “(그런 환경 속에서) 10~20년 지났는데 갑자기 자신이 행복했던 어린 시절에 보던 사람이 나타났으니 난리가 난 것”이라며 “그럴 수밖에 없다. 피끓는 청춘이 너무 어려운 과정을 지나온 뒤에 나를 만났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이렇게 어렵게 자라온 2030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물었다. 김 씨의 대답은 간단했다. “잘 컸다.”

그는 “이 험악한 세상에서 살아남았지 않나. 취직하고 알바(아르바이트)하고 부모 손을 떠나 독립하기 위해 (하는) 노력을 보면 (잘 컸다는 생각이 든다). 그 틈에서 열심히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격려했다.

또한 김 씨는 자신을 이 자리에 있게한 건 2030세대라고 칭찬했다. 그에게 40~50년간 종이접기 한 우물을 파게 만든 것이 지금 2030세대라는 것이다.

그는 “나는 KBS에서만 (종이접기 프로를) 17년 했다. 꾸준히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2030세대가 (나에게) ‘잘한다’ ‘종이접기는 김영만’ ‘종이접기의 대가’ ‘갓영만’ 등 계속 격려를 해줬기 때문”이라며 “(그래서) 내가 다른 길로 갈 수가 없었다”고 고마움을 드러냈다.

아울러 김 씨는 “(종이접기 외에) 다른 일은 할 수 있는 자신도 없었고, 하기도 싫었다. 전국 강의 다니면서 코딱지들 만나는 게 즐거웠다”면서 “요즘 강의 다니면 그 세대 친구들이 아이 데리고 와 옆에 앉혀 놓고 같이 (종이접기) 한다. 세상에 2·3대까지 강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행복이고 행운”이라며 종이접기와 2030세대에게 각별한 애정을 표현했다.

인터뷰를 통해 만나본 김 씨는 시종일관 긍정적이고 겸손한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이 말하기 전까지는 본인의 나이를 잊고 산다는 그. 마리텔 당시 사용했던 ‘영맨(youngman)’이라는 별명이 딱 알맞았다.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는 그 비결은 무엇일까.

김 씨는 “나는 원래 긍정적인 사람”이라면서 “청장년들을 많이 만나다보니 내가 그들의 생각에 많은 감동을 받는다. 그들이 가진 생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니 나에게 들어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강의 현장에서 만나는 청·장년들과의 소통을 통해 늘 항상 젊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그 비법인 것이다.

또 “내 생각과 마음은 언제나 즐겁다”면서 “(나는) 내가 즐기는 강의를 한다. 내가 즐거우면 상대방도 즐거울 수밖에 없다”고 강의할 때의 마음가짐을 전했다.

김 씨는 “강의 후 자신의 강의가 즐거웠다는 말을 들으면 좋다. ‘오늘도 성공’(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쾌활한 목소리로 답했다.

언제나 푸른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에게 앞으로의 꿈을 질문했다. 그는 “가장 큰 꿈이 아이들이 와서 종이접기하고, 유아 미술에 대해 즐기고 놀고 갈 수 있는 체험 미술관을 짓는 것이었는데 이걸(아트오뜨) 지었다”면서 “나머지 꿈 하나 남은 게 있다”고 말을 건넸다.

그가 ‘해야할 일’이자 품은 꿈은 바로 재능기부다. 전국에 있는 어려운 보육원, 도서지방의 분교나 초등학교 등 문화적으로 수혜를 받지 못하는 곳에 강의를 가고 싶다는 것.

우리의 ‘종이접기 선생님’은 여전히 몸은 커버렸지만 마음은 아직 덜 여문 수많은 코딱지들을 위로해주고 있다. 

 

강민정 기자 kmj@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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