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먼저 반성해야 한다”
“우리 먼저 반성해야 한다”
  • 이상봉 
  • 입력 2004-03-31 09:00
  • 승인 2004.03.3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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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안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가장 잘 나갈 때와 가장 어려울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그릇이 결정되는 법! 그런데 한나라당의 위기 탈출 노력은 그 의도와는 달리 점점 더 자기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방송사 방문이나 탄핵안 가결의 불가피성을 계속 옹호하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국민들을 더욱 더 멀어지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한나라당 일부 소장파 의원과 원외 총선 출마자들이 여의도 샛강 파천교 옆 공터에 ‘천막 당사’를 짓고 기존의 한나라당 입장과는 전혀 다른 생각과 위기 탈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의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방송사를 방문하거나 각종 여론조사를 ‘조작’이라고 매도하는 지도부와 달리 이들 소장파는 한 마디로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성난 국민들을 되돌릴 수 있는 길은 오직 “겸허한 자기 반성과 철저한 자체 개혁”뿐이라는 것이다. 아직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천막 안에서 매트리스 위에 얇은 이불을 덮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는 소장파들. 박종철 기념사업회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했던 박종운 부천 오정구 출마자는 “이제 우리는 무(無)에서 시작해야 한다.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다. 충분히 우뚝 설 수 있다”며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탄핵안 가결 후 국민적 반발을 예상하지 못했냐는 질문에 “우리가 승부에 관한 한 정치 10단인 노무현 대통령에게 당했다. 국정 운영에는 10급에 불과한 노 대통령을 너무 무시하고 철저하게 계산된 작전에 말려든 것이다”며 한나라당과 자신의 미련함을 인정했다. 역시 학생 운동권 출신으로 한나라당 영등포갑 후보로 나서는 고진화 출마자도 비슷한 판단을 하고 있었다. “충분히 예상되었던 상황이었다. 여론은 예나 지금이나 3:4:3 이었다. 앞의 3은 노사모 같은 그룹이고, 뒤의 3은 노대통령을 반대하고 탄핵도 찬성하는 그룹이다. 중간의 4가 노 대통령은 반대하지만 탄핵은 안된다는 그룹인데, 이 그룹이 역풍 주도 세력으로 돌아선 것이다. 노 대통령이 거듭되는 우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염장’을 지르는 일을 자행해서 결국 이렇게 된 것이다. 우리가 어리석었다”고 후회했다.

다른 소장파들도 대체로 이와 비슷한 의견을 나타냈다. 이 점에 관한 한, 탄핵안 가결 이후의 원인 진단에 있어서 이들 소장파와 당 지도부의 차이는 거의 없어 보였다. 하지만 위기를 탈출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이들 소장파가 더 거침없고 근본적인 것 같았다. 박종운 후보는 “우리가 미련해서 노 대통령에게 철저하게 당했지만 국민들이 우리들에게 ‘너희가 대통령을 탄핵할 자격이 되느냐?’고 꾸짖었을 때 할 말이 없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랄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우리가 솔직하게 말해서 ‘똥 묻은 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해, 반성의 기미가 역력했다. 이는 지도부 입장과는 상당히 다른 반응이다. 이런 자기 반성이 있기에 이들의 위기 탈출 해법에서도 당 지도부로부터 들어볼 수 없는 신선한 입장이 제시되고 있다.

박종운 후보의 말.“어차피 탄핵안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으니까 냉정한 자세로 결과를 기다리고 그에 앞서 한나라당의 처절한 자기 반성이 필요하다. 우선 당사와 연수원을 당장 매각해야 한다. 열린우리당은 영등포에 당사를 마련해서 쇼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뭔가? 우리가 ‘천막 당사’를 마련한 것도 바로 그런 처절한 반성의 몸부림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 중앙당사에서 개최되는 각종 회의에 불참할 것이다. 새 대표도 중앙당사에서 나와 천막이나 컨테이너 박스에서 집무해야 한다.” 잠시 ‘천막당사’에 들른 한나라당 부설 윤여준 여의도 연구소장도 소장파의 견해에 적극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윤 소장은 “한나라당이 거듭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람을 바꿔야 한다. 다른 어떤 꼼수도 국민들을 감동시킬 수 없다. 철저한 인적 쇄신만이 살 길이다”라고 말했다.

박종운 후보는 누가 누구를 탄핵하느냐의 국민적 비판에 맞서 “우리 자신의 허물이 많다. 우리는 차떼기 정당 아닌가. 이 시점에서 두 말할 것 없이 의원직 총사퇴를 해야 한다. 열린우리당은 총사퇴한다고 해놓고도 54억 국고보조금 때문에 비열하게 그냥 넘어가려고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사퇴해야 한다. 차라리 번호가 밀려 4번, 5번으로 가더라도 지금 시점에서는 훨씬 낫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진화 후보도 마찬가지 각오를 보였다. “지금 소소한 이익을 따지기 시작하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그런 모습 자체가 아직 자기 반성이 부족한 측면을 보여준다. 우리는 절대로 당사로 들어가지 않는다. 당 지도부도 여의도 당사에서 당장 나와 선거도 고수부지에서 하는 것이 낫다. 우리는 ‘천막농성’하는 것이 아니다. ‘천막 당사’로 옮겨와 있는 것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의 요구는 이번 탄핵 사태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나 방송 탓을 하기에 앞서 먼저 한나라당 자신에 대한 자기반성과 비판으로 초점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되었다. 고진화 후보가 천막 당사 참여 소장파를 대표해서 결론을 맺었다. “한나라당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세력이 바뀌어야 한다. 그들은 영남지역주의에 기생하는 세력이다. 이번 천막 당사 투쟁은 이런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번 대표 경선으로 국민의 반감을 바꿀 수는 없다. 행동없는 말로써 국민을 설득하려고 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오직 실천만이 한나라당을 회복시킬 수 있다.”

윤여준 여의도 연구소장 “당이 살려면 사람을 바꿔야”

겉과 속이 새롭게 태어나야 국민불신 해소돌아온 장자방 윤여준 의원. 여의도 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윤 의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전략가다. 그러기에 윤 의원 눈에 천막농성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당의 정체성을 걷어낼 비책을 찾고 있는 윤 의원의 입장을 들어봤다.

- 어떻게 해야 한나라당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한나라당이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간단하다. 국민들에게 구태의연한 한나라당이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사람을 바꿔야 한다. 다른 어떤 것도 이 시점에서 소용없다. 당의 정체성이나 이념적 좌표도 부차적이다. 최우선적으로 겉과 속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혐오를 해소해야 한다. 그런 뼈저린 변화가 없이 어떤 선거 전략도 필요 없다.

- 대표 경선이 새바람을 일으킬 수 있지 않겠나.▲그것도 현재로서는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 지금 위기는 단순히 당 대표를 바꾼다고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들 5인이 당을 새로운 모습으로 보이게 할 수 없다.

- 좀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 외에 다른 회생방안이 없다. 왜냐하면 지금의 위기는 열린우리당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 우리 스스로 국민들의 지지를 밀어냈다는 측면이 강하다. 우리 지지자들 중 20%가 떨어져 나갔다. 이것을 진지하게 따져봐야 한다. 그 경우 회복이 가능하다. 저쪽(열린우리당)이 잘해서 지금 지지율이 높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해서, 우리에게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된 것이다. 따라서 다시 한나라당 지지자를 끌어모으려면 철저하게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

이상봉  pneuma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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