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재계를 대표할 전경련 회장에 누가 취임하느냐에 관심이 집중됐었다. 하지만 각 그룹 오너들은 ‘재계 수장’자리를 맡지 않으려고 서로 눈치를 봤다. 집권 초기 참여정부의 강도 높은 재벌개혁이 예상되면서, 재계 대표로 정부와 맞서야 하는 전경련 회장 자리가 부담스러웠기 때문.결국 기업 총수들의 강력한 추천에 못 이겨 손길승 SK 회장이 막중한 자리에 오르게 된다. 특히 이건희 삼성 회장이 직접 손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 손 회장이 마음을 굳히게 됐다는 후문이다. 그리고 얼마 후 이건희 회장의 비서실장과 신라호텔 사장을 역임한 현명관씨가 전경련 상근 부회장으로 취임하면서, 그 약속은 지켜졌던 셈이다. 이후 전경련은 ‘SK 손 회장- 삼성 현 부회장’체제를 유지하며, 재계 목소리를 대표해왔다.특히 전경련‘손길승(SK)-현명관(삼성) ’체제의 출범이후 삼성과 SK가 그간 껄끄러운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밀월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대두됐다.
이로 인해 “SK의 손 회장이 이끌고 있는 전경련이 노골적으로 ‘삼성 편들기’에 나섰다”며, 재계의 불만이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실정이다.그 중에서 LG와 현대차 등은 ‘전경련’을 주축으로 이뤄지고 있는 ‘SK·삼성의 밀월’에 대해 강한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LG는 SK와 삼성의 연합에 가장 피해(?)를 본 기업. LG는 ‘손·현’체제의 전경련 행보에 따가운 눈총을 보내고 있다. 우선 전경련의 삼성 편들기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전경련은 지난 6월초 ‘기업투자 관련 국내기업 역차별 규제’보고서를 통해 “국내 S사는 1999년부터 4년간 법인세로 약 4조9,000억원을 납부한 반면, 외국인 투자기업인 L사는 7년간 면세혜택을 받았다”며 삼성전자와 LG필립스를 지목, 삼성을 두둔하는 인상을 줬다. 이에 대해 LG의 구본무 회장은 “전경련 회비를 내느냐고 말하는 회사 직원들이 있다”며 전경련측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LG는 실제‘손·현’체제 출범이후 전경련 회비를 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SK-삼성’전선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LG와 삼성의 최고경영자들간 설전도 벌인 바 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나라를 위해 천재 육성에 주력해야 한다”며 ‘천재론’을 펴자, LG 구본무 회장은 “천재는 조직의 위화감을 조성한다. 천재보다는 최고경영자(CEO)를 육성해야 한다”며 ‘CEO 육성론’으로 맞섰다. 사사건건 대립하던 두 기업간 신경전이 총수들간 마찰로 최고조에 달했던 것. 사회분위기는 ‘천재론’보다는 ‘CEO육성론’에 공감을 표시하며, 겉으로는 LG의 승리로 끝났다.하지만 최근 불거진‘하나로 통신증자’문제를 둘러싸고 LG는 ‘SK·삼성’전선으로부터 심한 타격을 받았다. 지난 5일 하나로통신 임시주총에서 LG가 제안한 5,000억원 유상증자안은 삼성전자와 SK텔레콤의 반대로 부결됐다. 이로써 LG는 하나로통신 인수를 통해 ‘통신 3강’을 꿈꿨지만 두 기업의 반대전선으로 인해, 좌초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 업계에서는 LG의 통신 3강의 꿈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 SK와 삼성전자가 견제에 나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LG로서는 삼성과 SK를 달래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하든지, 아니면 통신 3강의 꿈을 버려야 할 처지가 됐다. 그러나 LG와 SK 등은‘하나로통신’을 놓고 이미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태다. 실제로 SK텔레콤이 제안한 외자유치안을 LG가 거부한데 이어 이번엔 LG의 유상증자안을 SK텔레콤이 반대하고 나서며 티격태격하고 있는 상태다. LG측은 하나로통신 인수를 통한 통신시장 살아남기 전략을 위해서는 SK·삼성의 연합전선의 벽을 넘어야 할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현대차그룹도‘SK·삼성 연합’에 ‘LG가 당하고 있다’며 LG에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분위기라는 것이 재계의 시각이다. 현대차 역시 SK·삼성의 연합전선 격인 전경련 등과 미묘한 갈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최근 임단협 노사합의안을 둘러싸고 전경련과 현대차가 갈등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 전경련은 성명서를 통해 “이번 현대차 노사합의안은 기업경쟁력을 향상시켜 국가경제 성장동력을 강화해야 하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우려스러운 결과”라며 “사실상 경영 주요사항에 관하여 노조의 거부권을 인정한 금번 합의는 현대자동차 기업자체의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뿐만 아니라 타기업에도 그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외국인 투자유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작금의 어려운 경제상황과 맞물려 총체적인 경제위기를 가속화시킬 수 있다”며 현대차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또 이번 협상과정에서 파업기간에 대해 생산성 향상 격려금 명목으로 지급함으로써 무노동무임금 원칙도 지키지 않았다며 현대차를 압박했다.이에 대해 현대차측은 ‘장기파업으로 해외수출 중단과 신인도 하락이라는 긴박한 경영현황에 대한 속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있다’며 발끈하고 나섰다. 전경련이 현대차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취지인 셈이다. 현대차 임원들 사이에서도 전경련이 노사문제에 대해 지원사격을 해주지도 않으면서 이제 와서 비난만 하고 있다는 불평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현대차측은 “주 5일 근무제를 놓고 노동계와 한참 협상을 진행하면서 회사가 곤욕을 치렀지만 전경련은 수수 방관하는 자세를 보였다”면서 “이제와서 전경련에서 비판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반박했다.현대차 내부 일각에서는 노사협상과정에서 전경련 등 경제단체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한 것은 전경련 수장이 ‘SK·삼성’출신이기 때문이라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즉 “이번 비판 성명서가 삼성 등의 음모에 의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것. 이에 대해 현명관 부회장은 최근 한 경제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삼성을 떠날 때 이미 모든 것을 버렸다”며 ‘삼성 연계설’을 일축했다.
롯데도 ‘SK·삼성’연합전선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롯데측은 최근 전경련이 주관하는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서울총회 장소 문제로 크게 반발했다. 이 행사는 당초 5월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 때문에 8월로 연기되는 과정에서 호텔신라로 장소가 바뀌었다. 롯데 측은 호텔신라 사장 출신인 현부회장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의심을 좀처럼 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이처럼 전경련‘손·현’체제이후 재계 일각에서는 ‘SK·삼성’간 연합전선을 기정사실화하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SK·삼성’을 대립각으로 LG·현대차 등이 동조하는 형태로, 재계 갈등이 전개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재계 관계자는 “최근 사안별로 이해충돌이 많아지면서 대기업간 앙금이 남아 있는 상태”라며 “재계가‘내편, 반대편’등 편가르기 양상으로 번질 경우,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밝혔다.
정하성 haha70@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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