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불 망(三不忘) - [7]
삼 불 망(三不忘) - [7]
  •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 입력 2018-06-04 14:09
  • 승인 2018.06.04 14:09
  • 호수 1257
  • 5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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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이 당시 원나라는 적자(嫡子)를 두지 못한 성종(成宗, 티무르)의 건강이 좋지 않은 관계로 왕족 간에 왕위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충선왕은 연경에서 숙위한 지난 10년 동안 황제의 조카 회령왕(후의 무종) 및 태자 아유르바르와다(후의 인종) 형제와 침식을 같이하면서 주야로 서로 떨어지지 않고 지냈다. 
1307년(충렬왕33) 정월 초. 원나라 성종이 죽고, 충선왕은 무종(武宗)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무종이 즉위하자 사태는 오히려 반전되었다. 충선왕의 폐적과 계국대장공주의 개가가 거의 이루어지려던 차에 충선왕은 고려 국왕보다 위계가 높은 고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던 심양 지역을 다스리는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졌던 것이다. 
그해 4월. 원 조정에서 입지가 강해진 충선왕은 간신배 왕유소 일당과 서흥후 왕전을 처형하였다. 한달 후, 경수사(慶壽寺)라는 절에 유폐되었던 충렬왕은 비참한 몰골로 귀국하였다. 이후 충렬왕은 실권을 충선왕에게 빼앗기고 이듬해 7월 향년 73세로 타계했다. 
1308년 7월. 충선왕이 다시 10년 만에 왕위에 복위되었다. 이로써 충선왕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요동지방과 한반도를 동시에 다스리는 왕이 된 셈이다. 충선왕은 다시 정치 쇄신에 열의를 보여 개혁을 단행했다. 조세의 공평, 인재등용의 개방, 공신 자제의 중용, 농잠업의 장려, 동성결혼의 금지, 귀족의 횡포 엄단 등 다시 한 번 개혁정치를 표방하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원나라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충선왕은 즉위 두 달 만에 숙부인 제안대군(齊安大君) 왕숙(王淑)에게 정권을 대행케 하고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다. 2개의 왕위를 가진 충선왕은 연경에 머물며 원나라의 국정에 깊이 관여하였다. 고려의 국익을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이 때문에 즉위시에 발표했던 개혁안들은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충선왕은 원나라 생활을 즐기며 전지(傳旨, 멀리 떨어져 있는 왕이 전달자를 통해 신하들에게 내리는 교지)를 통하여 국정 전반을 운영했다. 또한 충선왕은 해마다 포 10만 필, 쌀 4천 곡(斛), 기타 많은 물품을 원나라로 가져갔다. 
그러나 ‘전지정치’가 가지고 있던 가장 큰 한계는 측근들의 부정 비리와 사적인 탐욕을 억제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충선왕이 직접 고려 국정에 개입하지 않고 자신의 측근들을 통해서 개혁을 시도하려고 한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충선왕 복위 이듬해인 기유년(1309, 충선왕1) 4월. 수첨의정승(守僉議政丞) 최유엄(崔有)은 충선왕에게 귀국할 것을 청하는 전문을 보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임금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음을 생각하여 ‘누구를 우러러  받들겠는가’하는 백성들의 심정을 양찰(亮察)하시고 속히 행차를 돌려 ‘어느 달에나 오실까’하고 고대하는 신들의 심정을 살펴주시면 신들은 더욱 성은에 감격하면서 선왕의 유업을 영원히 보전하도록 미력이나마 신명을 다 바칠 것이옵니다.”
고려 신하들은 충선왕의 귀국을 빈번히 간청하였으며, 원나라에서도 그의 귀국을 종용했다. 그러나 충선왕은 이를 듣지 않았다. 결국 충선왕은 1313년 6월 잠시 귀국하여 둘째 아들 강릉대군 왕도(王燾)를 충숙왕(忠肅王)으로 즉위시키고 조카 왕고(王暠)를 세자로 삼은 후, 이듬해 다시 원나라로 갔다. 
충숙왕의 몽골 이름은 아라눌특실리(阿刺訥失里)였고, 어머니는 몽골 여인 야속진(也速眞)이었다. 그는 16살의 어린 나이에 고려 제27대 국왕이 되었다.
충선왕이 즉위한 지 5년 만에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본성이 불(佛)을 좋아하고 글을 즐기며 그림을 잘 그리는 등 정치와 권력에는 애착이 적었던 까닭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원인은 원나라 조정에서까지 충선왕이 고려로 귀국할 것을 권고하였기 때문에, 이를 회피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왕위를 물려준 것이었다.

네 소년의 <박연폭포> 결의 

고려 전기에는 사학 출신들이 대거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등용되자 관학이 부진하고 사학은 성황을 이루었다. 개경에는 12개의 사학(12공도 十二公徒)이 국립대학인 국자감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는데, 이 12공도 중 해동공자 최충(崔沖)의 9재학당(九齋學堂,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도 함)이 제일 유명하였다.
사학의 설립자들은 학식과 명망이 높고 과거시험관인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한 사람들이었다. 무인정권·원간섭기를 거쳐 사학은 국가의 통제를 받으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고려 유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을 했다.

무술년(1298, 충렬왕24) 6월 말일.
오뉴월 지루한 장마도 물러가고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에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불볕더위는 권부 학당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권부 학당은 개경 만월대 동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무성한 녹음으로 둘러싸여 있는 학당의 거무스레한 돌담장 양쪽으로 백일홍과 백합꽃들이 질서정연하게 피어 있었다. 마치 꽃들이 돌담을 아름답게 포위하고 있는 듯한데, 그 총총한 꽃길 사이를 벌들이 어지러이 오고 가며 꿀을 따고 있었다.  
대문 안의 학당은 여름 방학을 앞두고 마지막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은 쉽게 늙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이요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 : 순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이라. 
미각지당춘초몽(未覺池塘春草夢: 연못가의 봄풀이 채 꿈도 깨기 전에)이니 
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 계단 앞 오동나무 잎이 가을을 알린다)이라. 
성년부중래(盛年不重來 : 젊은 시절은 일생에 두 번 오지 않는다)하니
일일난재신(一日難再晨 : 아침도 하루에 두 번 오지 않는다)이라
급시당면려(及時當勉勵 : 때를 놓치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라)하고
세월부대인(歲月不待人 :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이니라.

권부 학당에서는 세월의 덧없음과 시간을 아껴 학문에 임할 것을 권장하는 <주문공(朱文公, 주희)의 권학문(勸學文)>과 <도연명(陶淵明)의 성년부중래(盛年不重來)>를 팥죽 같은 땀을 흘리며 암송하는 동자(童子)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날 점심 무렵이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자 여름방학을 맞이하는 문도(門徒)들은 저마다 알찬 방학 생활을 보내겠다는 꿈에 부풀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귀가하고 있었다. 그 문도들 중 집으로 가지 않고 다시 학당의 뒤꼍에 있는 자두나무 아래에 모인 네 소년이 있었다. 열세 살짜리 동갑내기 4인방인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 안축(安軸), 최해(崔瀣)가 그들이었다. 
분주하게 모인 네 소년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주렁주렁 탐스럽게 달린 자두나무에서 자두를 하나씩 따서 살며시 한 입씩 베어 물었다. 달고도 새큼한 맛이 혀끝에서 입안 가득히 퍼져나갔다. 
먼저 이제현이 말문을 열었다.
“너희들, 박연폭포를 구경한 적이 있니?”
그러자 박충좌가 대답했다. 
“몇 년 전에 아버지를 따라 가본 적이 있어.”
이어 이제현이 박연폭포로 소풍을 가자는 제안을 했다. 
“우리 모두 쏟아지는 폭포수 밑에서 한여름의 더위를 식히는 탁족(濯足) 여행을 하는 것이 어떨까?”
최해가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하자, 박연폭포에 가서 탁족을 하면 사람의 몸에 날개가 돋아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될 거야(羽化登仙 우화등선).” 
안축도 한 마디 거들었다.
“박연폭포 아래서 탁족이라, 은자(隱者)가 따로 없겠네.”

박연폭포는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폭포로 황진이와 서경덕과 함께 ‘송도3절’로 널리 알려져 있는 명승이다.

박연폭포로 탁족 여행을 가기로 금방 의기투합한 네 소년은 다음 날 새벽 묘시(卯時, 오전 5~7시)에 탄현문(炭峴門) 밖 버섯같이 둥글게 퍼진 느티나무 고목 아래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고목 옆 널찍한 대지(臺地) 위에 있는 반월형 제단은 그 옛날부터 마을사람들이 치성을 드리던 곳으로, 주변의 평평한 마당에서는 동네 아이들이 격구와 칼싸움을 하는 장소였다.
간밤에는 천둥과 폭풍이 휘몰아치고 번개가 번쩍이면서 세상을 삼킬듯한 기세였다. 뇌성벽력(雷聲霹靂)의 굉음에 놀라서 깬 네 소년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언제나 무서운 폭풍우가 그칠 것인가, 과연 박연폭포에 갈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문지방을 드나드느라 새벽잠을 설쳤다. 그러나 새벽녘이 되자 뇌성벽력과 빗소리가 잦아들더니, 동녘에 아침 해가 뜨자마자 희뿌연 물방울의 잔흔은 온데간데없고 거짓말처럼 화창한 날씨가 전개되었다. 청명하게 열린 여름 하늘은 밤새 숨겨둔 속살을 감춤 없이 드러내고, 바람 한 점 없는 날씨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려고 재주를 부릴 모양이다. 
개경에서 박연폭포로 가는 길은 산과 물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구재동을 지나 탄현문을 나와 산세가 험하고 계곡이 깊은 길로 접어들어 성거산으로 연결된다. 
새벽녘에 탄현문에서 만난 네 소년은 각자 장만한 요깃거리가 든 작은 괴나리 보따리 행장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개경에서 박연폭포까지는 60리 길이다. 산속을 헤쳐 지름길로 가더라도 왕복 100리 길은 족히 되기 때문에 네 소년은 발길을 재촉했다. 
성거산으로 가는 길섶에 무성한 소나무는 송진이 끓어올라 여름 햇볕에 번쩍이고  있었다. 산기슭의 낮은 곳에 자리한 들풀들은 찬란한 햇빛에 온몸이 반짝였다. 갓난아기 키만큼 성큼 자란 노란색의 물레나물, 청자색의 숫잔대, 붉은색의 제비동자꽃과 같은 개경 시내에서는 볼 수 없는 여름 들풀들이 형형색색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오전 나절이 지나자 삼복의 햇발은 불길을 머리에 끼얹는 듯 대지를 달구었다. ‘소뿔도 꼬부라든다’는 찌는 듯한 삼복더위에 네 소년은 연신 구슬처럼 방울방울 맺힌 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이며 걸었다. 마침내 나무다리를 건너 야트막하고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오르자 눈앞에 웅장한 박연폭포가 시야에 들어왔다. 네 소년은 마음이 설레고 가슴이 뛰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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