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웹툰 시장은 신천지다”

[일요서울 | 권가림 기자] 80년대 말~90년대 초, 만화방이라 불리는 대본소가 주택가 골목마다 전국적으로 2만여 개가 넘었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만화의 황금기였다. ‘공포의 외인구단’ 이현세, ‘신의 아들’ 박봉성, ‘아기 공룡 둘리’ 김수정 등의 책을 안 보고서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특히 게슴츠레한 눈에 뻣뻣하게 뻗쳐있는 머리, 순해 보이지만 절대로 고집을 꺾지 않는 ‘요절복통 불청객’의 구영탄은 대본소의 간판이었다. 한국 만화사에 길이 남을 이 불멸의 주인공은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 태어났는지 고행석 작가에게 들어봤다.
- 30대 늦깎이 문하생…만 부 ‘히트 작가’로 우뚝
- 일본만화 수입한 1998년 한국만화 와르르…웹툰도 한몫
고행석 작가(70)는 전남 광양군 다압이라는 작은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이후 그는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 3학년 때 여수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만화를 알게 됐다. 고 작가는 “몇 년 전 작고하신 김중래 선생님 만화를 가장 좋아했다. 그분 만화를 흉내 내고 연구했다.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그림을 참 잘 그리셨다. 어쩔 수 없는 가족력인 것 같다”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는 늦깎이 작가다.
당시는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만화계에 입문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고 작가는 25살 되던 해 서울로 상경했다. 1년 후 첫째 딸까지 낳게 되자 그에게 ‘시간 투자’와 ‘도전’은 사치가 됐다.
이에 동물 의인화 만화를 그리던 최경이 작가 밑에 들어가 생활비를 벌고 악착같이 배웠다.
만화계는 문하생으로 입문하면 제일 먼저 뒤처리를 하게 되고 그러다 조금씩 배경을 그린다. 그 다음 단계에선 인물 터치를 하고 연필로 밑그림을 그린다.
고 작가는 2년간 밑그림, 즉 뎃생을 맡았다. 이후 박기준 작가 밑으로 옮겨 7~8년을 더 일했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30대 중반의 문하생. 그의 말을 빌리자면 만화계에서 ‘노땅’이 됐다.
원고 퇴짜 스트레스
신경쇠약·대인기피증 걸려
무더운 한여름, 산동네에 코딱지만 한 대본소를 차렸다.
고 작가는 다른 작가에게 일감을 받아와 5만 원을 받고 뎃생을 했다. 아내는 대본소 일을 봤다.
그는 여윳돈이 조금 생기자 자작을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작품을 들고 출판사에 갈 때마다 퇴짜를 맞기 일쑤였다.

결국 고 작가는 이 작품을 들고 ‘동대문 보따리장수’라고 불리는 유령 출판사에 26만 원을 받고 팔았다.
당시 일반 회사원 월급 정도니 꽤 괜찮은 값이었다.
그의 데뷔작 ‘아빠 아빠 우리 아빠’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몇 달 후 한 출판사는 고 작가에게 원고를 의뢰했다. 꿈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됐지만 그곳에서 그는 신경쇠약에 걸렸다. 이 때문에 1년 만에 27kg이 빠지기도 했다. 원고를 가져갈 때마다 편집부 국장, 차장 등에게 꾸중을 들었기 때문이다.
만화계 대부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대인기피증이 생긴 고 작가는 보험회사 외판원이 되기 위해 시험을 보는 등 외도를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명 버거씨병이라고도 불리는 말초혈관폐색증까지 왔다. 오른쪽 다리 혈관이 막혀 발가락에서부터 썩어들었다.
의사는 다리를 잘라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는 “아직도 원인은 모르지만 칼로 뼈를 긁는 고통이다. 1시간에 한 번씩 통증이 왔다. 일하다가 땅에 뒹굴기도 하고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다행히 잘 맞는 약을 찾아 치유됐다”라고 당시를 덤덤히 회상했다.
이내 고 작가는 다시 펜을 잡았고 ‘요절복통 불청객’ 구영탄을 그려 냈다.
약 만 부가 팔렸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이다.
질 좋은 일본만화에
한국만화 시장 무너져
고 작가는 “내가 오랜만에 책을 내니 독자들이 반가웠나보다. 처음엔 반응이 없길래 다른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출판사 사장이 달려와서 엄청나게 팔리고 있다고 하더라”고 내심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구영탄이란 이름은 당시 많이 쓰던 연탄인 구공탄에서 가운데 글자만 변형한 것이다. 쉽게 외우기 위해서다.
특히 반쯤 감은 눈은 고 작가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한 공부를 하다 얻게 된 아이디어다. 그는 “구영탄의 얼굴각과 머리 모양 등은 내가 좋아하던 일본 만화 ‘내일의 조’ 주인공과 비슷하게 그렸다. 여기에 부처님의 표정을 넣어보려 했다”며 “내가 몸과 마음이 지쳐보고 나니 독자들에게 ‘구영탄처럼 근심 걱정하지 말고 여유 있게 살라’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고 탄생 비화를 소개했다.

대본소 만화의 특징은 대량생산에 있다.
그의 화실에서도 한 달에 30권의 만화책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스토리 작가 등 100여 명으로 꾸려진 그의 팀이 작품을 함께 도왔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처럼 잘나가던 한국 만화는 지난 1998년 이후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본만화의 수입을 허용한 시점이다.
일본만화는 5%의 인세를 후불로 지급한다. 게다가 페이지 수도 많고 양장으로 만들어진 책이 대다수다.
반면 한국만화는 30%나 되는 인세를 선불로 줘야 한다. 책도 얇다.
대본소가 줄어든 대신 비디오와 만화책 등을 빌릴 수 있는 대여점이 골목마다 생겼지만 대여점은 값싼 일본만화만 들였다. 그나마 있는 대여점마저도 현재는 없어져 버렸다.
여기에 웹툰 시장이란 신천지가 생겼다.
대본소를 지켜야 한다는 그의 고집과는 달리 시대의 흐름은 무색할 만큼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고 작가는 “만화시장이 주춤한 이유 중 하나는 웹툰 때문이다. 사실 밉기도 하다”면서 “나도 최근 ‘지옥도’로 웹툰에 도전하고 있다.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단편 스토리를 접목시킨 새로운 장르인 것 같다”라면서 처음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웹툰의 주요 독자인 20~40대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 최근 방영된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열심히 시청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만화를 그려 먹고사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만화가는 판검사 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들여야 겨우 먹고살 만하다는 것이 그의 전언이다.
고 작가는 “노력에 비해 수입이 적은 직종 중 하나가 만화가다. 다만 정말 그림 그리는 것이 좋다면 책과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를 보고 들어야 한다”며 “스토리 구성은 소설 작가가 준비하는 것처럼 하면 된다. 히트 작가가 된다는 것은 만 명 중 20명에 불과하다. 만화가를 정말 희망한다면 죽을힘을 다해서 연습해야 한다”라고 만화가 지망생들에게 조언했다.
권가림 기자 kwonseoul@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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