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신문고…‘청와대학교 대나무숲’ 되나

[일요서울 | 권가림 기자] 이른바 ‘여론 바로미터’로 자리매김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국민 소통 창구로 활용되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역사 왜곡부터 지역감정 조장 청원까지 게재되는 것을 지켜본 일부 국민은 청원 게시판이 ‘분노 배출 창구’로 변질할 수 있다는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운영 9개월의 명암, 과연 장수 게시판이 될 수 있을지 일요서울이 들여다봤다.
- 시행 9개월 19만2595여 건 청원…답변 1호는 ‘소년법 개정’
- 지역감정 조장 청원도 등장…전문가 “기존 제도 활성화해야”
태종 원년, 대궐 밖에 달았던 신문고(申聞鼓)는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자신의 원통함을 알리기 위해 사용됐다.
하지만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 지방에 사는 백성이 한양까지 올라와 신문고를 울리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게다가 신문고를 두드리기 위해선 자신이 사는 지역 관청에 신고하고 확인서를 받은 후 또다시 관찰사에게 확인서를 받아야 하는 등 절차도 까다로워 실제 신문고를 치는 백성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접근성이 높아진 ‘21세기 신문고’ 청와대 국민청원은 어떨까.
지난 25일 기준 19만2595여 건의 청원이 올라왔다. 특히 게시판에 오른 청원은 온종일 주요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에 머물러 있는 등 영향력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앞서 청와대는 지난해 8월 19일 새 정부 출범 100일을 맞아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기조 아래 국민청원 게시판을 신설했다.
국민 청원은 국정 현안과 관련해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가 모여 30일간 20만 명 이상의 추천을 받은 청원에 대해 정부와 청와대 관계자가 답변할 수 있도록 했다.
스텔라 데이지호에 관한 글은 ‘국민 청원 및 제안’의 첫 청원이었다. 당시 9명의 시민이 청원에 동의했다.
이후 ‘제2의 개성공단’, ‘비리제보처를 만들어주세요’, ‘공공기관 무조건적인 정규직전환을 반대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오면서 청원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청와대의 첫 답변은 ‘소년법 개정’과 관련된 청원이었다. 지난해 9월 3일부터 11월 2일까지 진행됐던 이 청원은 총 29만6330명이 참여해 청원답변 1호라는 이유로 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현재 답변 요건을 충족해 답변 대기상태인 청원은 ‘삼성증권 시스템 규제와 공매도 금지’, ‘티비 조선의 종편 허가 취소’, ‘세월호 관련 청문회 위증한 조여옥 대위 징계’ 등 6건이다.
1일 평균 666건 청원
시민 83.7%, 국민청원 긍정적
대부분 시민은 청와대의 국민청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지난 3월 19일 취업포털사이트 인크루트가 성인남녀 3516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국민청원제도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3.7%는 청와대 국민청원 제도에 대해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응답자의 32%는 국민청원제도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로 ‘청와대와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의견 표출이 힘든 사회적 약자들의 의사 표현 기회’라는 이유가 25.1%로 그 뒤를 이었다.
수치로만 봐도 청와대 국민청원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정책이 시작된 이후 1일 평균 666건, 한 달 평균 2만여 건의 청원이 꾸준히 게재됐다.
이 중에는 ‘경기 남양주시 다산신도시 아파트 단지 실버택배 도입 반대’, ‘미세먼지에 대해 중국 정부에 항의해 달라’ 등의 청원에 답변을 받아 국민적 공감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청와대의 국민청원 게시판이 열띤 관심을 받자 지방자치단체 또는 다른 정부부처에서도 비슷한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경상북도 소방본부는 지난 1월 24일 소방청원제도를 전국에서 처음으로 도입했다.
아울러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 24일부터 국민이 불안해 검사를 요청하는 식품·의약품 등을 직접 검사하고 그 결과를 공개하는 ‘국민청원 안전검사제’를 시행 중이다. 식약처에도 국민청원검사제가 도입되는 셈이다.
접근성 높아 황당 청원도
역기능 서서히 드러나
반면 일부 국민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의 의미가 퇴색될까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작성자가 익명을 보장받다 보니 악의적이고 단순히 불만을 표출하는 글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전라도(경상도)를 대한민국에서 독립시켜주세요’, ‘대일본 제국이 다시 한 번 미개한 조선을 식민 지배해 줬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청원이 대표적이다.
황당한 청원임에도 당시 여러 명이 동의하며 공감대까지 형성되는 등 낮은 시민의식이 드러나 문제가 심각했다.
이 밖에 그룹 엑소 팬들이 지난해 12월 홍콩서 열린 ‘2017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 수상 결과를 놓고 제기한 청원도 논란을 산 바 있다.
엑소는 당시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했다. 올해의 가수상과 남자그룹상엔 각각 방탄소년단과 워너원이 수상했다.
하지만 팬들은 엑소가 모든 부문에서 투표 1위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다른 상이 돌아가지 않았다고 불만을 제기하며 부정 투표를 주장한 것이다.
아울러 게시판이 본인 인증을 요구하지 않아 한 사람이 여러 아이디를 생성할 수 있는 점을 악용하는 사례도 있다. 실제 ‘낙태죄 폐지’ 청원은 중복 청원이 이뤄지고 있다는 정황이 입증됐다. 당시 청원 만료 하루 전인 지난해 9월 29일에만 15만 명이 동의했지만 중복 청원을 했다는 ‘인증 글’이 SNS에 쏟아졌다.
청와대가 내놓은 답변이 ‘원론적’이라는 비판도 쏟아지고 있다. 청와대는 암호화폐 규제 반대 청원에 대해 “가상통화 거래 과정에서의 불법행위와 불투명성은 막고 블록체인 기술은 적극적으로 육성해 나간다는 게 정부의 기본 방침이다. 현행법 테두리 내에서 가상통화 거래를 투명화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두고 있다”라는 답변을 내놨다.
특히 국정농단 게이트에 연루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정형식 서울고법 부장판사에 대한 특별감사를 요구한 청원에 대해선 “청와대는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독립해 심판한다고 하고 있다. 청와대가 판사를 파면할 권한은 없다”고 답해 ‘하나 마나 한 답변’이라는 불평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기존 제도의 활성화를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청와대가 국민 목소리를 듣겠다는 취지는 좋다. 하지만 자칫 국정 운영이 포퓰리즘으로 흐를 수 있다. 대통령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심어진 상태에서 국정 운영이 될 우려가 있다”며 “인권위와 정당 등 기존 제도를 통해 국민 목소리가 반영되는 것이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권가림 기자 kwonseoul@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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