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법원 재판부는 “혐의가 모두 인정되고 엄중한 제재가 필요하지만, 국가 경제에 이바지했다는 점에서 관용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며 “특히 최 회장의 경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재를 출연하고 담보를 제공한 점 등이 인정된다”고 결론지었다. 법원이 재벌 총수에 대해 다소 ‘너그러운’ 판결을 내린 셈이다. 이 날 최 회장은 결과에 대해 만족스러움을 드러냈다. 상당히 고무된 표정이기까지 했다. 그는 “기업인으로서 분발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며 “기업 경영에 매진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SK그룹 내부에서도 이번 판결로 인해 그동안 최 회장의 운신의 폭을 좁혔던 악재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몇 몇 그룹에서는 최 회장이 사실상 ‘면죄부’를 받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시선도 보냈다.
하지만 최 회장의 마음이 변했을까. 불과 5일 만인 지난 15일.최 회장은 대법원에 상고를 결정했다. 항소심 판결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SK그룹 관계자는 “최 회장이 지난 15일 법원에 상고장을 제출했다”고 밝혔다. 최 회장이 항고심을 불복하고 상고를 결정한 것은 본인의 죄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시선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실형 선고에서 집행 유예, 또 다시 상고를 할 경우 바라는 것은 뻔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무죄 선언을 원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SK그룹 안팎에서는 법원의 2심 결정이 나오자마자, 최 회장의 변론을 맡은 법무팀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는 얘기도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최 회장 무죄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일까. 사실 최근 들어 재벌 총수들 중에서 최 회장만큼 법정에 자주 들락거린 사람도 없다.
애시당초 사건이 불거진 것은 지난 2003년 2월 중순. 당시 최 회장은 SK글로벌의 분식회계, SK그룹과 JP모건의 이면계약 등으로 인해 검찰로부터 기소를 당했다. 결국 1심 공판의 결과는 실형이었고, SK그룹의 존폐 위기설까지 나왔었다. 하지만 불과 2년 만에 상황은 역전됐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최 회장이 진짜 바라는 속내는 무엇일까. SK그룹 관계자는 “특정한 결과를 염두에 두고 대법원에 항고한 것은 절대 아니다”며 외부의 시선에 대해 부인했다. 하지만 SK안팎에서는 법무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얘기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SK그룹은 다른 재벌그룹들과는 달리 회사 내에 전문 법조팀을 두고있지 않았다. SK그룹은 SK(주) 윤리경영실 산하에 법무 1팀과 2팀을 두고 있다. 사건이 벌어진 지난 2003년까지만 해도 SK그룹 내부에서는 법조인을 찾기 힘들었으나, SK는 이번 소송을 거치면서 전문 법조인을 대거 영입했다.
지난해 6월에는 대검 중수3과장을 지낸 김준호 부장검사를 윤리경영실 부사장으로 영입해 틀을 갖췄다. 하지만 이들이 실제 최 회장의 변호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SK그룹은 법무팀과의 연계 하에 최 회장에 대한 변호는 법무법인 김&장에 전적으로 맡겼다. 그런데 최근 SK법무팀에서 ‘너그러운’ 법원의 2심 판결이 난 이후에 오히려 사무실 불이 꺼지지 않는 등 근무 강도를 높이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SK그룹의 또 다른 관계자는 “사실 법원의 2심 판결이 뜻밖일 정도로 우호적이어서 (항고할 경우)좀 더 나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 역시 당시 경제상황으로 인해 분식회계가 어쩔 수 없었음을 인정받고 무죄판결을 받고 싶은 걸까. 2심 판결이 나자마자, 최 회장은 오는 넷째 주에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SK(주) 이사회에 참석하고자 출국 준비를 서두르는 등 바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정혜연 chy@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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