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중순 사건 발생
문제가 된 곳은 한서저축은행. 한서저축은행은 1971년 인천에 ‘한도권업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후, 다음해부터 금융업 허가를 받은 중소은행이다. 이 은행의 본점은 인천시 남구에 있고, 부평과 분당에 각각 지점을 두고 있다. 지난해 12월 31일을 기준으로 거래 고객 수는 약 5만8,026명, 순익은 12억원 정도. 현재 이 회사는 지난 2001년 교보생명 사장을 지낸 김재우씨가 맡고 있다. 이 은행은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은행이었다. 그런데 이 은행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이달 초였다.
금융감독원이 난데없이 이 은행에 대해 조사에 착수한 것. 금감원 관계자는 “한서저축은행에서 고객이 예치해 둔 예금에 대해 지급을 거부했다는 민원이 발생해 조사를 벌였다”고 말했다. 은행이 고객이 맡겨놓은 예금 지급을 거부했다니, 조사에 들어갈 법한 일이다. 그런데 비슷한 시점 부평경찰서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었다. 이번 사건의 중심 인물인 은행 여직원이 사건이 터지자마자 자살을 했기 때문이다. 부평경찰서 관계자는 “한 여성의 자살 사건이 접수돼 수사를 시작했다”며 “은행과 사채업자가 연루되는 등 복잡한 사건인데, 현재 수사 중인 상황이어서 자세히 말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영업을 하고 있던 은행은 순식간에 업계 관계자들이 도마 위에 오르게 됐다.
여직원은 사건 발생후 자살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은행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사건이 터진 것은 지난 5월 중순. 하루는 본인들이 채권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4~5명이 은행을 찾아와 자신들이 예금한 돈 45억원을 지급해달라고 했단다. 그런데 은행에서 확인해본 결과, 이들이 주장하는 45억원의 예금은 은행에 입금돼있지도 않고, 은행측에서 전혀 알지 못했던 돈이었다는 것. 한서저축은행 감사팀 관계자는 “민원이 발생해 확인해본 결과, 이들이 돈을 맡겼다는 여직원이 예금잔액증명서를 허위로 작성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여직원을 퇴사처리하면서 문제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여직원은 은행에서 퇴사처리가 된 지 일주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사채업자들이 은행에 맡긴 돈을 ‘횡령’ 한 것인지, 아니면 이들이 돈을 맡긴 적이 없는데 증명서를 ‘허위’로 발행했는지의 진실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죽고 만 것.
은행 “오히려 우리가 피해자”
이 때부터 은행과 채권자의 싸움이 시작됐다. 은행측은 채권자들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은행 관계자는 “확인한 결과, 여직원이 이들 채권자들과 사채거래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며 “사채를 사용한 이후, 상환에 부담을 느껴 은행의 예금잔액증명서를 허위로 꾸민 것으로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결국 은행측의 주장은 이 거래는 여직원과 사채업자들 간에 이뤄진 ‘개인 거래’인 만큼, 은행이 여기에 책임을 질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또 이 관계자는 “증명서를 확인해본 결과 45억원이 아니며, 실제 여직원이 조작한 금액은 20억원 정도였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은행측은 채권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은행 영업에 피해를 입었다는 분위기다.
은행 관계자는 “은행측이 45억원 지급을 거부하자 채권자 중 한 명이 당행 앞에서 시위를 벌여 업무방해죄로 검찰에 고소를 하기도 했다”며 “이 문제가 계속 불거질 경우, 형사소송도 불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은행 측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채권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면 반박하고 있다.금감원에 따르면 이들은 “은행이 45억원을 물어내야한다”고 계속 말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의 주장은 본인들은 분명히 여직원을 통해 45억원을 예금했고, 또 그 직원이 이 돈을 횡령한 이상 은행 측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 이들은 “개인 간에 이뤄진 사채거래가 아니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돈을 예금시킨 것 일뿐”이라며 “직원이 횡령했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은행측에서 물어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법정소송으로 번질듯
하지만 이 사건은 해결의 키를 쥐고 있는 여직원이 사건 발생 직후 자살함에 따라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더군다나 당사자인 채권자(본인들의 주장)와 은행이 법적 소송까지도 불사한다는 방침. 사채업자, 계약직 여직원, 저축은행이 연루된 ‘45억원대의 금융사건’이 해결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 금융권은 지금…‘금융사고 주의보’
최근 석 달 사이에 잇따른 금융사고가 발생해 금융권에 ‘적색 신호’가 켜졌다. 이들의 수법이 날로 대담해지고 있는데다가, 사고 금액이 최소 수 십억원에서 수 백억원대에 이른다는 점에서 관계당국의 대책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하나은행 전주 모 지점에서 여직원이 회삿돈 20여억원을 횡령했고, 같은 달 조흥은행에서는 김모씨가 전산조작을 통해서 회삿돈 400여억원을 횡령한 사건이 발생했다. 또 지난 5월에는 외환은행과 동원투자신탁운용에서 회사 직원이 수십억원대의 공금을 횡령한 것이 적발됐다. 회사공금을 횡령한 사람들은 일정 기간을 정해놓고, 수차례에 걸쳐 회사 돈을 빼돌린 것으로 확인됐다.
또 이들 대부분은 빼돌린 회사 돈을 주식에 투자했다가 손해를 보자 이를 메우기 위해 추가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금감원 조사 결과 밝혀졌다. 그런가하면, 이 달에는 인터넷 뱅킹에 구멍이 뚫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속출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지난 3일 모 은행의 인터넷 뱅킹이 해킹으로 뚫렸고, 3일 뒤인 10일에는 또다른 은행의 전산망에 허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당국의 철저한 사전 검열과 감독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금융권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모럴해저드가 가장 큰 문제”라고 꼬집었다. 때문에 몇 몇 은행에서는 당행 직원을 상대로 윤리교육을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혜연 chy@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