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계 이르기까지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
윤석민 전 대한선주 회장의 이력을 보면 경제계에서 정계에 이르기까지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대한선주 외에도 서주산업이라는 회사를 차려 고향인 충청도에서는 꽤 저명인사였다. 1938년 청원에서 태어난 윤 전 회장은 청주상고를 졸업한 뒤 1961년 고려대 법대를 나왔다. 1983년에는 미국 골든스테이트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는 정치에 입문하기 전이던 1969년에 서원농산이라는 농산물가공업체를 세워 처음 기업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후 1971년 서보물산을 계열사로 만들었으며, 1973년에는 한국통조림수출조합 이사장을 맡았고, 1977년에는 진양해운을 설립해 해운업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다가 1977년 공기업이던 대한해운공사 회장을 맡은 뒤 민영화(실제로 대한해운공사의 원주인은 한양대학교 이사장인 김연준 회장이었다)된 이 회사의 이름을 대한선주로 바꿔 1978년부터 1987년까지 회장을 지내다가 한진그룹에 이 회사를 넘겼다. 그는 1980년에는 학원재단인 혜원여중고재단을 만들어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그는 경제계뿐만 아니라 1981년 국민당 부총재를 맡으면서 정계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그해에 청주 청원지역구 11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그의 이력에서 보듯 윤석민 전 회장의 이력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그의 가족환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처조카 사위라는 점이다. 그는 해운공사 인수과정에서 김연준 이사장이 삼성그룹에 회사를 넘기려고 하자 이를 가로막았을 만큼 막강한 힘을 과시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의 부인인 고 육영수여사 언니의 막내 사위로 장덕진 대륙연구소회장 한승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정영삼 한국민속촌회장 등과 동서지간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의 파워는 막강해 박 정권 시절까지만 해도 박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그의 성공질주는 5공에 접어들면서 내리막길로 치닫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 불어닥친 해운산업 불황으로 회사의 자금사정이 어려워졌고 박 대통령 서거후 윤씨의 파워도 예전만 같지 못했다. 결국 이를 타개하기 위해 5공 초기 정치에 입문해 청주 청원지역구에서 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세칭 ‘문형태-정내혁’ 사건이 터지면서 막다른 길로 치닫기 시작했다.
대한선주, 한진해운에 매각 화려한 시절에 ‘먹구름’몰려
윤 전 회장의 친동생 윤석조씨의 장인이던 문형태(예비역 육군대장)씨가 당시 민정당 대표이던 정내혁씨의 비리를 투서해 정가가 시끄러워지자 국세청은 1984년 7월부터 4개월 동안 문씨의 비자금이 대한선주에 유출입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무려 6개월 동안 세무조사에 들어갔다. 이 사건으로 금융가에는 대한선주 부도설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가뜩이나 어려웠던 대한선주는 궁지에 몰렸다.결국 그는 임기가 남아 있던 의원직을 사퇴까지 하면서 회사를 살리기 위해 나섰지만 적자폭은 점점 늘어나 결국 1987년 3월 해운합리화 시책에 의해 한진해운으로 매각되고 말았다. 매각 당시 윤 전 회장은 채권단이 요구한 경영권 포기각서에 서명을 거부하면서 버티다가 1988년 11월 회사를 넘겼다. 그후 윤씨는 자신은 전두환씨에게 밉보여 기업을 뺏긴 피해자라는 논리를 폈다. 매각 당시 이원조 전 은행감독원장, 정인용 전 재무부장관, 사공일 전 청와대경제수석,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이 경영권 포기를 강압했다고 폭로했다.
그후 윤 전 회장은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 32명을 직권남용혐의로 고소했다가, 거꾸로 검찰은 5공정권이 끝난 뒤 착수한 5공비리 수사 당시 업무상 횡령 및 외화밀반출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을 발부했고, 윤 전 회장은 검찰의 출두요구를 묵살한 채 4년여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 그 후 그는 공소시효가 만료된 1993년 10월 검찰에 자진 출두, 조사를 받은 뒤 서울 용산구 보광동 자택 인근에 ‘브라이팅코리아’라는 개인 사무실을 차리고 재기를 모색했다. 그는 옛 대한선주 계열사였던 서주산업을 간신히 되찾아 옛 경영인들을 합류시킨 뒤 나름대로 탈출구를 찾기 시작했지만 서주산업의 불법어음 발행 사건이 1990년대 중반에 터지면서 재기플랜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특히 그는 지난 15대 총선에서는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 후보로 청주 흥덕지역구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이즈음 법정관리를 받고 있던 서주산업의 불법 어음사건이 터져 정치스캔들로 비화되기도 했다. 특히 당시 서주산업이 발행한 불법어음은 정상적인 상거래를 하면서 발행한 어음이 아니고 영업실적이 거의 없는 관계회사를 통해 사채업자나 단자회사에서 자금을 차입하면서 담보로 제공한 것이어서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기도 했다.
‘인간미 넘치는 경영인’
기자는 1988년 무렵 윤석민 전 회장과 만난 후 서주산업 사건이 터지기까지 약 10년 동안 그를 지켜보았다. 한동안 언론에 윤 전 회장의 불체포와 관련해 ‘안잡나, 못잡나’라는 유행어가 나돌았고, 기인에 가까운 그의 ‘올백’ 헤어스타일과 관련해 세인들의 궁금증을 낳기도 했다. 경제기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윤석민 전 대한선주 회장은 ‘인간미가 넘치는 경영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한가지가 빠져 있었다. 그것은 ‘마음을 비우는 진인사대천명’의 마음가짐이었다. <다음호부터는 ‘정주영과 보낸 하루’ 편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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