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기관에 지급하는 이자만 매년 1,500억원에 달했다. 대우조선은 결국 지난 87년 부도가 났다. 김 회장이 정부로부터 인수한지 9년만이다. 김 회장은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대우조선이 망하면 2,000여개에 달하는 하청업체까지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에 한국 경제가 적지 않은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게 김 회장의 생각이다. 김 회장은 수차례에 걸친 정부와의 줄다리기 끝에 차입금일부를 탕감 받을 수 있었다. 이자도 모두 탕감받기로 약속했다. 이에 대한 조건은 원금을 탕감해주는 만큼 자구노력을 하라는 것이었다. “아무런 조건없이 원금을 탕감해줄 경우 재벌 특혜시비가 일수도 있습니다. 특히 일본 조선소에서 소송을 제기할 경우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생각해낸 묘수가 자구노력입니다. 제가 알기론 자구노력이란 용어도 이때 처음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 회장은 흔쾌히 정부의 요구를 수용했다.
김 회장은 포항에 위치한 풍국화학과 제철화학, 150만평에 이르는 해운대 매립지, 대우ITT 등을 처분하겠다는 의견서를 정부측에 제출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면서 대우센터 빌딩과 대우증권을 추가로 처분할 것을 주문했다. 곧바로 힐튼호텔에서 임원회의가 소집됐다. 해외에 있던 김 회장도 급히 귀국했다. 그러나 결론은 한가지였다. 대우그룹의 상징과도 같은 대우센터 빌딩은 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우증권도 당시 그룹의 알짜 계열사였기 때문에 매각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 회장도 당시 상공부장관을 만나 이같은 의견을 전달했다. 결국 상공부장관으로부터 대우센터와 대우증권의 매각을 백지화하기로 약속을 받았다. 대신 대우투자금융을 팔기로 합의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막상 팔려고 하니 매수자가 나오지 않은 것. 공개매각 공고를 냈지만 허사였다.
김 회장은 분할 매각을 결정했다. 우선 포항에 위치한 풍국화학과 제철화학을 포스코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당시 포스코에서 요구한 인수대금은 400억원. 정밀 실사를 통해 평가한 금액(550억원)보다 형편없이 적었다. 해결사는 역시 김우중 회장이었다. 김 회장은 박태준 당시 포스코 회장과 담판을 벌여 ‘경영권 프리미엄’을 포함한 650억원에 매각했다. 대우투자금융도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에게 400억원 이상을 받고 팔았다. 당시 매각한 회사가 지금의 동양투자금융이다. 문제는 해운대 매립지였다. 당시만 해도 해운대 매립지는 (주)대우 소유였다. 김 회장은 이 토지를 대우조선에 현물 출자하는 방식으로 전환, 토지개발공사에 20년 토지채권을 받고 팔았다. 다음은 김우일 전 구조조정본부장이 털어놓는 일화 한토막.
지난 89년 김 회장은 갑자기 임원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대우조선 합리화 의결 당시 매년 500억원 이상 원가를 절감하기로 약속했다. 아무래도 대우조선에 내려가야겠다. 그곳에 상주하면서 대우조선을 정상화시켜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거제도로 떠났다. 당시만 해도 김 전 본부장은 얼마 안있어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정말 1년 동안을 거제도에 머물렀다. 이로 인해 불편했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김 전 본부장은 설명한다. “회장은 거기서 밑바닥부터 위까지 모조리 뜯어고쳤습니다. 심지어 기능공 목욕탕을 관리하는 사람까지도 정리했으니까요. 회장이 거제도에서 꼼짝을 않다 보니 임원들은 수시로 헬기를 타고 거제도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지난 94년 단행된 대우중공업과 대우조선의 합병도 사실은 산업합리화 조치에 따라 단행된 수순이었다는 게 김 전 본부장의 귀띔이다. 당시만 해도 대우조선은 비상장이었다. 그러나 대우중공업과 합병할 경우 자본금만 1조원이 넘는 거대공룡이 상장하게 된다.
이 경우 주식시장이 훼손될 수 있다는 이유로 정부에서는 양사의 합병을 거부했다.김 회장은 산업합리화 의결 때 합의했던 조항을 제시했다. 김 전 본부장은 “회장이 정부측과 산업합리화 의결에 들어갈 때 양사의 합병조항도 슬쩍 밀어넣은 모양”이라면서 “이로 인해 정부는 양사의 합병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김 회장은 막대한 시세차익까지 챙겼다. 김 전 본부장은 “정부가 자구노력 차원에서 대우증권 매각을 요구했을 때 김 회장은 자신의 대우증권 주식 15%를 팔아 대우조선 증자에 투입했다”면서 “대우조선과 대우중공업의 합병이 성공하면서 김 회장은 천문학적인 시세차익을 남겼다”고 증언했다. 물론 이 주식은 나중에 다 소각됐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김 회장은 10배 이상 시세차익을 챙겼을 것으로 김 전 본부장은 설명했다. 이렇듯 김 회장은 대우그룹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기지를 발휘해 위기에서 벗어났다. 대우그룹 내에서 “안되면 회장님께 보고하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석 suk@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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