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경영진에 의해 기사가 일방적으로 삭제되어 파문이 일고 있다. 이윤삼 편집국장이 기사 삭제에 항의해 사표를 제출했다. 즉각 사표는 수리됐다. 편집국 기자들은 21일 비상총회를 열어 이 국장의 복귀와 금창태 사장의 퇴진, 경영진의 사과, 기사의 게재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시사저널>의 사태는 이학수 부회장의 인사 스타일을 비판한 기사가 이번 사태의 단초가 되었다. 도대체 어떤 기사인데 삼성이 그처럼 민감하게 대응했을까. 그 기사의 실체와 사건 전말을 집중 해부한다.
내부 제보자의 제보가 단초가 된 현대차그룹의 비자금 사건은 기업의 경영을 마비시키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검찰은 내부제보자의 도움으로 초스피드 수사를 진행했다. 제보에 의해 비자금 관련 장부는 물론 비밀금고까지 드러났다.
이번 삼성그룹 인사문제를 담은 <시사저널>의 기사도 내부 제보자의 제보에 의해 취재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기사의 내용은 이학수 부회장의 인사 전횡에 관한 것이다. 재목은 ‘이학수 부회장 권력, 너무 비대해졌다’였다. 6월 19일 발매된 <시사저널> 60~62쪽에 걸친 원고지 20매 분량의 기사였다.기사는 X-파일처럼 경천동지할 만한 특종을 담고 있기 보다는, 삼성 내부의 권력지형을 비판한 기사였다.
“이 부회장 파워 너무 커졌다”
삼성 2인자인 이학수 부회장이 계열사 사장단 인사에 지나치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반발하는 목소리가 삼성내부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게 핵심 내용. 기사를 작성한 이철현 기자는 경력 13년차로 10년 이상 삼성을 출입한 베테랑 경제기자이다. 그는 삼성을 출입하면서 형성된 인맥들을 통해 삼성의 내부사정을 알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시사저널>은 내부제보자의 제보와 <세계를 움직이는 삼성의 스타 CEO>(홍하상 지음)에 나온 내용을 참조하여 기사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세계를 움직이는 삼성의 스타 CEO>에는 이 부회장을 비롯하여 삼성CEO들의 성공스토리를 담고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이 부회장은 삼성의 2인자이다. 삼성의 상징적이고 대표적인 CEO는 누가 뭐래도 이건희 회장이다.
삼성에 있어 아버지 같은 존재이다. 이학수 부회장은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사장단의 인사권까지 쥐고 있다. 그래서 그를 삼성의 2인자라고 부른다. 이 부회장이 이처럼 삼성 내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이건희 회장의 전폭적인 지지 때문이다.
이 부회장이 이건희 회장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92년부터이다. 당시 이 부회장은 부사장급인 비서실 차장에 오른다. 이때부터 비서실 재무팀을 총괄하는 것은 물론, 이 회장을 곁에서 보좌했다. 삼성은 지난 3월 총수의‘황제경영’을 뒷받침하는 기구로 일부 시민단체 등의 비판을 받아 온 그룹 구조조정본부를 축소, 개편하면서 명칭도 전략기획실로 바꾸었다.
현재 전략기획실의 힘은 막강한 것으로 알려졌다.전략기획실에는 전략지원팀, 기획홍보팀, 인사지원팀 등으로 나뉘어 재무, 인사, 홍보 등을 총괄하고 있다. 또한 주요 경영 현안을 논의해 온 삼성기업구조조정위원회를 삼성전략기획위원회로 개편했다. 이 부회장은 전략기획위원회, 전략기획실 등 두 부서의 수장을 맡고 있다.
삼성의 간부들 사이에서는 “삼성의 힘은 회장, 계열사 사장단, 그리고 구조조정본부(현 전략기획실)의 삼각편대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전략기획실은 이건희 회장과 삼성 경영진이 경영판단을 하도록 어시스트하고, 이건희 회장이 경영방향과 전략을 제시하면, 각 계열사 사장단이 그 틀에 맞춰 실제 경영을 진두지휘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 만큼 삼성 내에서 위상이 높다.
제일모직 출신 출세
이 부회장은 지난 71년 삼성그룹 공채 12기로 입사했다. 첫 발령지는 제일모직 대구공장 경리과였다. 경리과 라인은 일명 ‘삼성 인재 사관학교’로 불리는 곳.현재 삼성CEO들 가운데 제일모직 출신이 많다. 유석렬(삼성카드 사장), 제진훈(제일모직 대표), 배호원(삼성증권 사장), 이상현(삼성전자 중국본사 사장), 송용로(삼성코닝 대표), 김징완(삼성중공업 대표), 배병관(전 삼성테크원 대표), 김현곤(전 삼성BP화학 대표), 이재환(전 삼성벤처투자 대표) 등이 모두 제일모직 경리과와 직간접적으로 연이 닿아 있다.
삼성전자 사장 중 유일한 재무관리 부문 사장인 최도석 사장도 지난 71년 제일모직에 입사하여 경리과장을 지낸 바 있다. 이들은 대체로 삼성 비서실을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제일모직 경리과와 삼성비서실이 최고의 엘리트 코스임을 방증하고 있다. <시사저널>은 내부 제보자의 말과 <세계를 움직이는 삼성의 스타 CEO>를 토대로 삼성 2인자인 이 부회장이 계열사 사장단 인사에 지나치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내부 제보자의 말을 빌려 “주요 계열사 사장단이 이학수 부회장과 인연이 깊은 사람들로 채워진지 오래이다. 최근에는 CFO마저 전략기획실(전 구조조정본부) 재무팀 출신 인사들로 배치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권력과 힘이 이 부회장에게 집중되면서 이에 대한 반발이 삼성내부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인사문제 다뤄 기사 막아
<시사저널>의 기사는 다른 기업들과 달리 충성심이 강한 삼성 내에서 반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내용만으로 충격을 줄만하다. 특히 그룹의 핵심 인사와 관련된 권력 집중 문제와 인사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기사가 나오는 것에 삼성측으로선 껄끄러웠을 것이다. 삼성의 인사원칙은 ‘인재제일’(人材第一)’이다. 선대 회장이 창업 때부터 그랬다. 선대 회장은 “내 인생에서 80%는 사람에 신경을 썼다”고 할 정도다. 사람이 최고다. 물건을 팔아 보지 않았고, 도장을 찍은 적도 별로 없지만 그 대신 사람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삼성의 인사철학은 우선 철저한 능력위주로 학연·지연·혈연이 배제되며, 공정하게 평가한다. 최고의 대우를 한다.
그리고 적재적소로, 적성에 따라 직원을 배치하며, 그릇에 맞게 권한을 이양해 준다. 신상필벌의 경우 삼성은 이에 대단히 엄격하다. 어떠한 부정이든 아무리 사소한 것도 용납이 안 된다. 이건희 회장은 이를 신상필상으로 바꿨다. 벌은 되도록 주지 말고 잘해도 상을 주고 못해도 상을 주라는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실패를 많이 해서 실패를 기록으로 남기는 사람에게 상을 주라는 것이다. 자기가 회사 일을 열심히 해서 실패했다. 그래서 회사가 몇 십억 원을 손해를 봤다. 그래도 그 사람은 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사저널>은 내부 제보자의 말을 빌려 “이 부회장이 힘이 세지면서 ‘인사독선’이 내부 비판을 낳고 있다”고 경고했다.
시사저널 ‘내홍사태’로 번져
<시사저널> 사태는 삼성의 실패한 로비가 단초가 됐다. 지난 19일 발매된 제870호 <시사저널>에 실릴 예정이던 삼성그룹 관련 기사를 경영진이 삭제해 파문이 일고 있다. 이에 항의해 이윤삼 편집국장이 항의성 사표를 냈다. 사측은 이를 수리해 편집국 기자들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편집국 기자들은 지난 21일 비상총회를 열어 ‘편집권 수호를 위한 대책을 논의했다.
‘<시사저널> 편집권 수호위’의 안철흥 위원장은 “<시사저널> 17년 역사 동안 편집국과 의논도 하지 않고 경영진이 일방적으로 기사를 삭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이번 사건을 “삼성 출신 사장이 삼성의 집요한 로비에 굴복해 편집권을 짓밟은 사태”로 규정했다이와 관련, <시사저널> 금창태 사장은 <일요서울>과의 통화에서 “기사 자체에 문제가 있어 기사를 삭제한 것”이라며 “편집인으로서 정당한 권한을 행사했다”는 입장이다.그러나 <시사저널> 편집권 수호위는 “삼성의 눈치를 봐서 기사를 삭제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현재 <시사저널> 편집권 수호위는 △금창태 사장의 퇴진 △ 최고 경영진의 사과 △이윤삼 편집국장의 복귀 △삭제된 기사의 재게재 등을 요구하고 있다.안철흥 위원장은 “<중앙일보> 출신인 금창태 사장이 취임할 때부터 이런 사태를 우려해 왔다”며 “금창태 사장의 퇴임만이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 첫 단추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가 불거진 뒤 가장 곤혹스러운 곳은 삼성이다. 삼성측은 취재 과정에서 이철현 기자와 이윤삼 편집국장에게 기사를 쓰지 말아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기사를 내보내겠다는 편집국 의지가 강해 기사가 그대로 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그러나 <시사저널>경영진이 기사를 삭제하면서 삼성이 로비해서 기사가 빠진 것으로 외부에 알려지면서 난감해 하고 있다.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기사내용에 문제가 있는 부분에 대해 정확한 기사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삼성내 사장급만해도 수십명이다. 그 중 한 두사람 정도가 인사에 불만을 품고 그렇게 했다면 전횡으로 볼 수 없다”면서 “로비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 이철현 기자 인터뷰“제보자는 충정에서 제보한 것”
삼성그룹의 인사문제를 비판한 <시사저널> 기사삭제 사건의 핵심에 선 이철현 기자. 그는 기자 경력 13년차 경제전문기자이다. 삼성그룹만 10년 이상 출입한 이른바 삼성통이다.
다음은 이 기자와의 일문일답.
- 취재하게 된 동기는.
▲ 경제기자로 삼성을 10년 이상 출입했다. 최근 삼성의 임원들과 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삼성의 패거리 문화에 대한 소회를 들었다. 삼성은 다른 기업들과 달리 조직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 그런데 최근 인사 불만이 많아졌다. 삼성에 패거리 문화가 팽배하다. 외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조직 내부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작기 때문이다. 권력비중이 한 군데 쏠리면서 언젠가 현대차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생겨나고 있다. 이것이 제보의 결정적 이유였다.
- 제보자는 누구인가.
▲ 주요 계열사의 인사담당 임원이다. 다른 한명은 퇴직한 임원이었다. 현대차 같은 꼴이 나는 것을 걱정했다.
- 문제가 된 기사의 내용은.
▲ 홍하상씨가 쓴 <삼성의 스타CEO>를 바탕으로 기사가 작성됐다. 현직 사장단 가운데 제일모직 출신과 주요 계열사 CFO가 구조본 재무팀 출신이 많다는 내용이다. 경천동지할 만한 특종도 아닌데 삼성이나 <시사저널>경영진이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조경호 news002@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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