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의 몸부림은 그야말로 처절했다. 노동자는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다 명예훼손과 집시법 위반으로 2차례 구속까지 되었다. 이들의 투쟁은 올해로 8년째, 날수로 따져 3,000일이 넘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소재 삼성SDI 해고 노동자 송수근(44)씨 가족의 이야기다. 최근 송 씨의 아내 박미경(38)씨가 한국의 거대기업, 삼성공화국과의 투쟁을 일기 형식으로 풀어 책으로 엮었다. ‘삼성SDI 해고 노동자 아내의 희망찾기’라는 부제가 달린 <들꽃은 꺾이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책에는 한 가족이 거대기업 삼성에 맞서 싸운 8년간의 몸부림이 그대로 담겨있다. 작은 비디오 가게를 꾸려가며 남편의 투쟁을 돕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켜낸 박미경씨의 인생역정을 들여다봤다.
삼성SDI 노사협의회 위원을 맡고 있던 송수근씨는 1998년 회사가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전환을 강행하려 하자 이에 반대한다. 송씨는 이를 막기 위해 외출과 본사 항의방문을 벌였다. 그런데 이후 송씨는 무단결근(외출) 등의 이유로 해고되었다. 같이 활동했던 다른 노사협의회 위원들은 정상근무 내지 월차 처리되었지만, 유독 송씨만 ‘무단’으로 처리된 것이었다.
이후 송씨는 복직 투쟁을 벌이다 회사로부터 명예훼손과 집시법 위반으로 2001년 구속돼 2003년 4월 만기 출소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에서 비디오 가게를 운영하는 박씨는 남편의 석방을 위해 투쟁에 나섰다. ‘피켓’이나 ‘1인 시위’가 뭔지도 모르는 평범한 주부였던 박미경 씨에게 남편 송수근씨의 해고는 그녀의 삶을 180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세계 유일무이한 무노조기업
송씨의 투옥생활은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삼성이 송씨의 형량이 확정되기 전 ‘고소취하’를 조건으로 집회 및 시위를 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합의서 작성을 제안했으나 송씨는 이를 거부했다.
그간 삼성이 노조 설립 및 회사를 상대로 한 싸움 등을 돈으로 무마시키고 있다는 의혹은 숱하게 제기되어 왔지만 그동안 철저히 숨겨온 탓에 정황이 드러나진 않았었다. 하지만 박씨가 해당 합의서를 세간에 공개하면서 ‘무노조 신화’ 삼성의 ‘해고노
동자 관리법’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A4용지 2매 분량의 삼성 해고노동자 관리법을 요약하자면, 일단 ‘시끄러운’ 해고자는 ‘얼마간의 돈’을 쥐어준 뒤 동료들과 ‘접촉을 끊고’ 회사 인근지역을 ‘떠나게 한다’가 주된 내용이다.
합의서 첫 장 1항에 따르면 피고소인은 “합의가 원만하게 유지되도록 노력한다는 자세를 보증하기 위해 일정 기간(3개월 이상) 고소인 회사 인근지역(언양·울산·양산)을 벗어나 타 지역에서 안정 및 요양”해야 한다.
이에 대해 박씨는 “고향을 떠나 어디로 가란 말이냐”며 “환자도 아닌데 회사 인근지역을 벗어나 요양을 취하라는 것은 곧 주변 사람들과의 접촉을 끊으라는 얘기”라며 울분을 토했다.
이 합의서의 두 번째 항목은 “생활안정을 위해 인도적인 배려로 일금 ○○○을 지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대여금’으로 표현된 이 돈은 삼성이 제시한 조건을 ‘2년간’ 성실히 이행해야만 변제된다. 여기서 말하는 ‘어떤 조건’이란 합의서 두
번째 장에 나와 있는 조건들을 말한다. 두 번째 장의 조건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피고소인은 삼성SDI 및 고소인 회사를 포함한 삼성그룹, 삼성그룹 계열사, 삼성그룹 임직원 등에 대하여 그 지역 및 타 지역 등에서 집회 및 시위를 통해 방송, 고함, 구호 제창 등의 행위로 고소인 및 고소인 관련자를 비방하거나 또한 비방하는 취지의 유인물 배포, 플래카드 게시, 피키팅 등의 행위를 하여서는 안 된다.
둘째, 언론, 잡지, 유선통신 및 PC통신 등 매체를 통해 고소인과 고소인 관련자를 비방하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일체의 행위, 각종 단체에의 투서 등의 행위를 하여서도 아니 된다.
셋째, 고소인과 고소인 관련자의 경영활동, 노사정책, 노무활동 등과 관련한 제반 사내외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거나 이와 관련하여 다른 사람들을 접촉하여 선동하는 등의 제반행위를 하여서도 아니 된다는 것 등이다.
즉 삼성의 합의조건은 ‘대여금을 지급할 테니 더 이상 삼성을 비방하지 말라, 이 조건이 지켜지면 대여금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인 셈이다.
8년간의 처절한 투쟁
또한 박씨는 책을 통해 회사로부터 미행과 감시 등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책에서 “해고 이후 계속된 미행, 감시, 구속 등 너무 억울하고 분통 터져 불면증에 시달리다 눈에 사자까지 보이고 환청에 시달려 결국은 우울증과 피해사고, 가슴 답답함, 신경쇠약 등으로 정신과 진료까지 받으며 홧병으로 고생했다”고 말한다.
8년간 세계초일류기업 삼성과 맞서 싸워온 박미경씨는 그동안 겪어왔던 삼성이라는 기업에 대해 “삼성에서는 불만이 있어도 찍소리 한 번 못 한다”며 “불만사항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간 인사고가나 진급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평생 문제사원(MJ)으로 낙인 찍힌다”며 치를 떨었다.
이어 그녀는 “노조 건설이 노동자들의 당연한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탄압을 일삼고 있는데 법과 상식에 위반하는 행동은 이제 그만 중단하고 삼성에 억울하게 피해 입은 분들에게 꼭 사죄했으면 좋겠다”며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우리가족처럼 삼성에 한 맺힌 사람들이 나오지 않도록 노력하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녀의 바람에도 불구 삼성SDI의 태도는 냉랭하기만 하다.
삼성SDI 관계자는 “우리와 관련된 사람도 아니거니와 일개 외부 노동운동자일 뿐인데 책을 출간했다고 해서 관심을 꼭 가질 필요가 있느냐”며 “책이 나왔다는 이야긴 들어봤지만 내용을 모르고 있을 뿐 아니라 관심 자체가 없다”고 말했다.
박씨가 책에서 밝힌 삼성의 감시, 감금에 대해선 “법적 조치를 취할지 아닐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아까 말했던 바와 같이 회사 관계자가 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미니인터뷰 삼성해고자 아내 박미경 씨
“납치, 감금, 폭행까지 일삼았다”
-삼성SDI의 노동자 탄압의 선은 어느 정도인가.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한 달 평균 500시간 정도 근무한다. 거의 모든 공정이 12시간씩 주·야 맞교대되기 때문이다. 바쁠 땐 휴일도 없이 일해야만 한다. 어쩌다 볼 일이 있어 8시간 근무를 마치고 잔업을 안 할 경우, 상사는 “다음부터 잔업을 안 시켜 고가에 불이익을 주겠다”고 협박하기 일쑤였다. 또한 3D 공정이라 하여 화장실 청소도 직원들에게 시켰다.
-도청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되었나.
▲남편이 삼성의 고소로 두 번째 구속되었던 당시 삼성SDI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난 뒤 집에서 자고 있는데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남편의 친구한테 전화가 걸려왔는데 삼성 노무팀이 전화를 받았다. 남편 친구는 “미경씨 없냐”고 물었고, 얼떨결에 전화를 받은 노무관리자는 “잠깐 어디 간 것 같다”고 얼버무렸다고 한다.
하루는 평소 기본료만 나오던 집 전화세가 만 원 정도 많이 나와 이상한 생각에 한국통신에 전화했더니 “옆집에 사는 어떤 아저씨가 송수근씨 집 전화선을 댕겨 써서 그렇다”며 전화세 용지를 다시 보내준 적도 있었다.
-감시나 미행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되었나.
▲어느 날 남편의 휴대폰이 갑자기 통화불능 상태가 되더니 4일 만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때부터 통화 중에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는 등 꺼림칙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어느 달은 휴대폰을 사용한 시간보다 요금이 더 나오기도 했다. 이에 남편이 이동통신사에 찾아가 항의했고, 관계자로부터 “누군가 복제폰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듣게 됐다. 또한 복제폰을 사용한 사람이 ‘친구찾기’ 서비스를 통해 남편을 감시해 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남편 송수근씨가 삼성 측 관계자에게 납치당한 사실이 있다던데,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달라.
▲98년 9월 부당 해고된 뒤 삼성SDI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기 위해 경찰에 집회신고를 하자, 집회 하루 전날 삼성SDI 관계자들이 남편을 납치해 경주 한화콘도에 감금시켰다. 그들은 남편을 감금시킨 뒤 폭행과 협박을 하며 술잔에 약까지 타서 먹였다. 그들은 술 한 잔에 정신을 잃은 남편을 자동차에 싣고 동해안 등지로 향하며 “회사와 타협하라, 안 그러면 너도 죽고 우리도 죽는다. 회사와 타협하지 않을 시엔 쥐도 새도 모르게 생매장 시켜버리겠다”는 등의 협박을 했다고 한다. 그해 11월께에도 남편을 각목으로 위협하는 등 상식이하의 행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 남편을 납치한 납치자 중 한 명은 “기자회견을 통해 양심 선언하겠다”며 미안하다고 사죄하기도 했다.
박지영 pjy0925@dailysun.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