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가 올해 말께 전면 개방”
“생가 올해 말께 전면 개방”
  • 박지영 
  • 입력 2007-03-08 11:17
  • 승인 2007.03.08 1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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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병철 회장 르포

삼성가가 2년여 동안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의 본가와 분가해 살던 집을 극비리에 복원해 온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고 이 회장의 분가한 집 복원공사는 단순 보수차원이 아닌 기존 저택을 복원한 것으로, 고 이 회장이 태어난 본가를 비롯해 고 이 회장이 분가하면서 살았던 집까지 광범위하게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삼성가는 고 이회장의 분가한 집 복원을 위해 적어도 수십억원 이상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2월 27일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분가한 집이 있는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장내마을을 찾아가 봤다.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의 한 시골 마을에 방문객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5일장이 성황을 이뤄 인근 상인들이 많이 모여든다’고 해서 마을 이름도 ‘장내마을’인 이곳은 초일류 글로벌기업인 삼성그룹을 창립한 고 이병철 회장의 본가와 분가한 집이 위치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 이 조그만 마을에 ‘이병철 회장의 생가에서 기를 받으면 기업인들은 사업이 번창하고, 일반인들은 부자가 된다’는 소문이 돌면서부터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지난 2월 27일 실제로 찾아간 장내마을은 소문과는 달리 여느 평범한 시골마을과 다름없었다. 마을 들머리 입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었고, 그 아래 그늘에는 마을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장기를 두고 있었다.

옆에서 훈수를 두고 있던 한 팔순 노인에게 고 이병철 회장의 본가와 분가한 집의 위치를 묻자 “저기 모퉁이를 끼고 곧장 올라가다보면 한옥집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눈에 띄는 두 집이 댁들이 찾는 곳”이라며 귀찮다는 듯 짧게 답했다.

노인의 말대로 벽면 곳곳에 페인트가 벗겨져 거의 쓰러져가는 시골집들 사이로 고 이병철 회장의 본가와 분가한 집이 눈에 띄었다. 같은 한옥집이라고 하기에는 그 광채가 남달랐다.

자료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기를 꺼내 사진 몇 장 찍어대자 어디서 “사진을 찍으시면 안됩니다”라는 제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 이 회장의 본가와 분가한 집을 관리하는 노집사였다.

72년부터 고 이병철 회장의 본가와 분가한 집을 관리하고 있다는 노집사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풍수지리학자나 교수 등 전문가들이 많이 찾았는데 올해 들어 일반 관람객들이 많이 찾는다”면서 “온 사람들을 문전박대할 수 없어 문은 열어주지만 원래 본가만 개방하지 분가한 집은 제한하고 있다”며 손사래를 쳤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아 방문객이 거의 없었는데 최근 삼성그룹이 수억원을 들여 본채와 사랑채를 개·보수해 놓은 데다 의령군이 생가안내 푯말을 도로 곳곳에 세워 놔 방문객들이 부쩍 늘어났다는 것이 노집사의 전언이다.

실제로 의령군은 ▲의령읍 백야 오거리 ▲면소재지 ▲국도 20호선 주변 ▲생가 들머리 등 총 9개소에 고 이병철 회장의 생가를 알리는 안내 표지판을 설치, 관광객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이해를 도왔다.


수십억 들여 생가 복원

실제로 삼성가는 지난 2004년 4월 25일 사업비 10억원을 들여 고 이 회장의 본가와 분가한 집을 전면 보수했다.

고 이 회장의 본가를 수리하기는 지금까지 모두 4차례. 이전 3차례는 부분적인 수리였지만 이번에는 전면적 복원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마을 주민에 따르면 당시 공사를 주최한 곳은 경복궁을 복원한 것으로 알려진 한국전통건축문화사업소였다.

삼성가는 이번 복원 공사를 통해 본가의 경우 사랑채(정면 4칸, 측면 1칸) 및 본채의 지붕과 벽 등을 전면 복원했다. 또 본가 정문에서 50여m 떨어져 있는 고 이병철 회장이 분가하면서 살았던 집은 정원을 현대식으로 꾸며 화사함을 더했다.

삼성가가 최근 고 이병철 회장의 본가와 분가한 집을 전면 보수한 것에 대해 노집사는 “지난 2003년 태풍 ‘매미’가 의령군을 휩쓸고 갔을 때 고 이 회장의 분가한 집 또한 큰 피해를 입었다”며 “당시 마을 뒤 저수지 물이 넘치면서 마을 전체가 1m가량 잠기는 바람에 고 이회장의 생가 흙담 일부가 무너져 구멍이 난 것을 계기로 전면적인 보수 공사에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수십억원을 들여 본가와 분가한 집을 복원한 이후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우리 노부부만 살고 있을 뿐 이곳은 빈집이나 다름없다”며 “우리가 매일 분가한 집과 본가를 돌며 마루와 방 등을 쓸고 닦는다”고 덧붙였다.

이곳에서 만난 마을 주민 A씨 또한 “이병철 회장의 장녀 이명희씨가 가끔 다녀가곤 했지만 이건희 회장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면서 “으리으리하게 복원만 해 놓으면 뭐하냐, 가끔 살펴도 봐야지”라며 혀끝을 찼다.

10년 이상 소유자가 방문 한번 하지 않았다는 A씨의 씁쓸한 전언을 뒤로 한 채 고 이병철 회장의 본가를 찾았다. 그곳에는 기자보다 먼저 도착한 군 관계자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군청 개방 요청 많아 긍정적 검토”

군 관계자는 “월례 회의처럼 시장·군수 협의회가 있는데 오늘이 마침 의령시장 차례”라며 “각 지역마다 월례행사가 끝나면 관광을 시켜주는데 우린 마땅히 관광시킬 곳도 없고 해서 이병철 선생님의 분가한 집과 본가를 개방하려 한다”고 군에서 마련한 유인물을 건넸다. ‘우리 고장의 인물 호암 이병철 선생 분가한 집 안내’라는 제목의 유인물에는 생가 전경 사진과 함께 건물 현황과 고 이병철 회장이 간략하게 소개돼 있었다.

생가는 개방이 안 되어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군 관계자는 “아직까지 전면 개방이 안 된 상태지만 꾸준히 삼성측에 관광지역으로 발전시키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며 “그룹 관계자들이 아직 구체적인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의령군이 이 회장 생가 주변 정비계획을 하고 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이어 “현재 삼성측 또한 군에 최대한 협조할 뜻이 있음을 밝혀왔으며 생가 개방과 관련 긍정적으로 검토중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개방 시기와 관련, 군 관계자는 “아무래도 집만 덩그러니 있는 것 보다 이병철 선생님의 유품이나 조경 등도 신경을 써야하지 않겠느냐”며 “오는 11월 29일이 이병철 선생 추모 20주년이니 그때쯤 하지 않겠느냐”고 귀띔했다.

고 이병철 회장 관광사업과 관련, 삼성문화재단 관계자는 “군청에서 개방 요청이 많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는 있지만 확정 단계는 아니다”며 “전면
개방을 하려면 안내를 해줄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하고, 여러 가지 준비해야 할 면이 많다”고 말했다.

수십억원을 들여 본가와 분가한 집을 복원한 것은 관광사업에 대한 준비가 아니냐는 물음에 재단 관계자는 “사업을 염두에 두고 복원한 것은 아니다”라며 “금액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원래 한옥 자재가 비싸고, 당시 매미 피해가 워낙 커 고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고 답했다.

한편, 의령군은 고 이병철 회장 생가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마을 진입로 주변 도로를 확충하고, 마을회관 앞 1,000여평의 부지에 공용주차장과 공중화장실을 조성키로 했다. 군은 또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0년에 맞춰 호암기념관과 홍보탑, 가칭 호암사상연구회 설립 등을 계획하고 있다.



“관광사업보다 중소기업 지어달라”

고 이병철 회장 생가 관광사업과 관련, 장내마을 주민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곳 주민인 B씨는 “외지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면 시끄럽기도 하고 혹여나 사건이 날까 불안하기도 하다. 이거야 원, 삼성을 욕할 수도 없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또 다른 마을주민인 C씨 또한 “관광 사업해봐야 동네 사람들한테 도움도 안 되고, 동네가 너무 발전이 없다보니 젊은 사람들은 자꾸 외지로 나가려고만 해서 지금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팔순 노인들”이라며 “지금이야 정정하다지만 언제까지 계속 살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한숨을 토해냈다.

C씨는 이어 “자기 집은 반듯하게 한 채라도 지었겠지마는 다른 사람들은 장마만 오면 하우스나 밭 등 물에 잠기기 일쑤”라며 “최근 다리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다 함안으로 넘어가버리고, 남아있는 사람들이라 해 봐야 고작 몇 사람 안 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여기 남아있는 사람들도 이씨와 남씨가 전부다”며 “어찌어찌 하다보면 다 지 사촌들인데, 마을 발전 좀 시켜달라고 어디 말 좀 전해주소”라고 부탁했다.

한편, 조선시대 때부터 고 이 회장 조상을 비롯해 경주 이씨들이 많이 살았던 장내마을은 150호 가량의 비교적 큰 마을이었으나, 1960년대에는 110호 가량으로 줄었고 현재는 고작 70여호 정도만 남아 있다.


박지영  pjy0925@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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