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의 은퇴, 인생 후반전 준비는 필수인가

- 21세기 신보릿고개 고령화 사회…2020년엔 ‘초고령’ 진입
- ‘어르신’ 아닌 ‘젊은 노인’…숨은 꿈으로 청춘 찾아
“곧 정년을 앞두고 있다. ‘철밥통’ 직장에 버티면서도 퇴직 후엔 진짜 좋아하는 직업을 찾고 싶다는 욕구가 컸다” “복지정책을 연구하다 몇 년 전 은퇴했다. 100세까지 산다는데 남은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겠다” “직업과 타이틀, 내가 어느 쪽에 비중을 두고 있는가에 대해선 아직도 모르겠다. 이젠 주변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일로 창직을 해보러 왔다” “외국계 기업 다니다 지난해 은퇴했다. 몇 개월 지나니 불안하더라. 충분히 다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해 유튜브, SNS 등을 통해 새로운 정보도 얻고 재취업 교육 수업에도 찾아가고 있다”
이는 지난달 27일 새로 개강한 서울시 ‘50 플러스 재단’의 ‘1인 창직:프리랜서 시작하기’ 강좌 수강생들의 자기소개다.
이 수업에는 중년으로 보이는 머리 희끗한 18명 수강생이 참여했다. 이들은 파주, 수지 등 서울에서 떨어진 지역에서 수업을 들으러 왔다고 했다.
맥아더교장으로 불리는 정은상 교장은 “현재 호주머니에 명함이 있는 분 손 들어보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이들 중 서너 명만 손을 들 뿐 나머지는 펜만 딸깍거렸다.
그는 “명함이 없어 자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퇴직 후 명함이 없다는 상실감에 빠지기 때문이다”라면서 “우리는 세 번째 시간에 명함을 만들 겁니다”라고 수업을 시작했다.
120세 시대
인생 이모작 필요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의 은퇴와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실제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인 인구는 올해 738만1000명(14.3%)에 달해 ‘고령사회’로 진입할 예정이다.
또 통계청은 2020년에 노인 인구 비율이 20%를 넘어서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며 2060년에는 41%까지 높아진다고 전망했다.
이에 따라 노년층의 재취업 문제도 국가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노년층은 수십 년간 직장생활에서 배운 전문지식을 겸비하고 있으며 젊은이들 못지않게 건강하다.
‘젊은 노인’으로 불리는 이들은 은퇴 후 삶을 재설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이 재활용되기를 희망한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7년 5월 고령층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현재 일하는 고령층 708만4000명 가운데 652만5000명(92.1%)은 계속 일을 하고 싶어 했으며 취업 경험이 있는 미취업자 532만8000명 중 150만5000명(28.2%)도 취업 욕구를 드러냈다.
시니어 교육 관련 시장은 최근 이러한 사회적 흐름에 급속히 팽창하고 있다.
특히 서울시 산하기관인 서울시 ‘50 플러스 재단’은 최근 중장년층의 열띤 호응을 받고 있어 눈길을 끈다. ‘50 플러스 재단’은 만50~64세를 대상으로 전문가 양성 교육 등을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받을 수 있도록 설립된 기관이다.
‘50 플러스 재단’ 중부캠퍼스 1층에는 돌봄 전문가 입문과정부터 제2 경력설계:50+새로운 일 찾기, 스타트업 1단계, 나만의 콘텐츠로 강사 되기, 50+진로탐색학교 등 50개 이상의 수업 안내 시간표가 게시돼 있다. 이중 절반 이상은 이미 마감 완료였다.
자신을 ‘58년 개띠’라 소개한 김영창 씨도 수혜를 받고 있는 학생이다. 그는 “모 방송국 개국 시절부터 영상 취재 기자 생활을 해 왔다. 몇 년 전 퇴임식을 했다”면서 “기자라는 명함이 지워지고 소속감이 없어진 것에 대해 심리적으로 불안했다. 그래서 직업탐색과정으로 수업을 듣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김영창 씨는 수십 년간 일해 온 자신의 전문 분야를 살려 영상을 다루는 법을 가르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오전엔 강사 양성 수업, 오후엔 컴퓨터 프로그래밍 수업에 참여하고 저녁엔 동아리 ‘쌩쌩밴드’ 연습실에 간다”며 “1인 미디어를 만든 후 후배를 양성하는 것이 내 목표다. 미래를 개척하며 바람직한 신 노년 문화를 나부터 만들고 싶다”는 희망을 내비쳤다.
은퇴 후 뒤늦게 자신의 꿈을 이룬 이들도 있다. 서울 마포문화재단 소속 시니어극단 ‘날 좀 보소’의 단원 조순자·유길동 씨 부부가 그 예다.
이들은 2012년부터 ‘달아 달아 밝은 달아’, ‘경로당 폰팅 사건’, ‘행복한 가족’ 등 4개 이상의 작품을 한 베테랑 단원이다. 부부는 지난해 11월 마포구에 위치한 포스트 극장에서 ‘소원을 말해봐’를 선보인 후 오는 11월 새로운 공연을 위해 극본을 고르는 중이다.
연극판 주역된
평균연령 69세 단원들

조 씨는 40년 넘게 초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했다. 조 씨에 따르면 그는 단조롭게 살아왔던 삶에 회의를 느꼈고 늘 동경하던 무대에 오르기로 했다. 조 씨는 “대학교 재학시절 잠깐 연극을 했다. 퇴직 후 무대에 꼭 서리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면서 “인터넷으로 ‘시니어 연극’, ‘시니어 극단’, ‘극단’ 등을 무작정 검색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첫 번째로 여성 극단에 찾아갔지만 고민에 빠졌다. 극단이 주로 30~40대로 구성된 것은 물론 동작이 큰 ‘맘마미아’ 춤을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
이후 조 씨는 당시 창단한 지 얼마 안 된 극단 ‘날 좀 보소’를 찾아가 오디션을 봤다. 그는 “단원들이 모두 사회에서 요직을 거친 후 은퇴한 사람들로 구성됐다. 연출자까지도 은퇴한 연극영화과 교수다”면서 “그래서 그런지 서로 마음이 잘 통해 6년 동안 함께 연극을 해 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극단 ‘날 좀 보소’ 단원들은 퇴직한 화가, 작가, 기자, 일반 회사원 등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이들이다.
조 씨보다 반년 늦게 은퇴한 유 씨도 아내를 따라 연극단에 합류했다. 40년 넘게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는 “정년퇴임을 한 입장에서 내 역할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할아버지나 아저씨 역도 괜찮다”면서 “다른 인생을 경험해 보는 거니까.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연극은 계속하고 싶다”며 연극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극단 ‘날 좀 보소’는 평균 연령 69세라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이다. 은퇴 후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의미가 담긴 극단 ‘날 좀 보소’는 매년 11월 공연 준비를 위해 12~3월에는 수많은 극단 대본을 검토한다.
극본은 주로 사회적 문제나 시니어 문제 등이 담긴 것을 선택한다. 이후 4월부터는 역할을 분배해 본격적인 연습에 돌입한다.
조 씨는 50~60대에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느낌에 대해 “신선하다. 그동안 나보단 직장과 가정에만 매달렸다”면서 “인생 이모작은 진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내 즐거움은 무엇인지 찾아서 공부하고, 노력하고, 표현해야 한다.
유 씨는 “평균 수명이 80세를 넘어섰지 않나. 60세에 은퇴했으니 앞으로 20년 더 남았다”며 “우리는 연극을 선택했지만 최근 여러 기관에서 그림, 탁구, 기타 등 저렴하고 질 좋은 수업들을 많이 개설했다. 남은 인생 즐겁게 삽시다”라고 전했다.
권가림 기자 kwonseoul@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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