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검정국이 청와대와 야당간의 정면대결 양상으로 비화되고 있는 가운데 정치권 일각에서는 때아닌 ‘소통령’ 논란이 일고 있다. ‘소통령’이니 ‘부통령’이니 하는 이른바 ‘실세’ 논란은 과거 정권에서도 늘상 제기됐던 문제다. 권력누수 현상이 나타나는 정권 말기 증후군으로 이러한 실세 논란이 끊이질 않았던 것.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출범한지 9개월여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정권말기적 증후군이 나타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한국 정치사에서 권력 2인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거나 정권교체후 한결같이 영어의 몸이 됐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교훈은 과거 잘못된 권력 2인자의 최후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러한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과거 정권에서도 권력 2인자는 늘 존재했다. 이승만 정권의 이기붕 전부통령, 박정희 정권의 차지철 전경호실장, 전두환 정권의 장세동 전안기부장, 노태우 정권의 박철언 전의원, 김영삼 정권의 김현철씨, 김대중 정권의 박지원 전청와대비서실장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최고통치권자 옆에서 권력2인자로 군림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유했다. 하지만 권력의 단맛은 한결같이 부정부패로 이어졌고, 이들 2인자들은 대부분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특히 이승만 정권의 이기붕과 박정희 정권의 차지철은 잘못된 권력 2인자의 최후가 어떤 것인가를 잘 대변하고 있다.45년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이씨는 49년 서울특별시장, 51년 국방부 장관을 거쳐 53년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취임하면서 실권을 장악했다. 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돼 민의원 의장이 된 이씨는 이 대통령의 종신집권을 위해 중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발의, ‘사사오입’ 사건을 주도하기도 했다. 56년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에 입후보해 낙선한 이씨는 60년 3·15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이씨의 끝없는 권력욕은 결국 이승만 정권 퇴진과 함께 일가족 자살로 막을 내렸다.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군중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이 대통령은 스스로 하야했고, 이씨는 자신의 장남에게 권총을 맞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실장이었던 차씨는 ‘각하가 곧 국가’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맹신론자였다.5·16 당시 육군 대위로 쿠데타에 참여한 차씨는 박정희 소장의 경호 장교를 맡으면서 신임을 얻기 시작했다.74년 경호실장에 임명된 차씨는 경호실을 단순히 대통령의 신변을 돌보는 차원을 넘어 대통령의 권력을 경호하는 권력의 중심부로 키워나갔다. 차씨의 집무실에는 ‘각하를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란 표어가 붙어 있었다.차씨는 박 대통령 경호를 명분으로 경호실의 역할과 위상을 무한 확장했다. ‘대통령 경호 위원회’라는 특별기구를 만들어 중앙정보부장, 국방장관, 내무장관,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육해공군 참모총장 등이 위원을 맡고 자신은 위원장을 맡음으로써 명실상부한 권력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차씨도 무리한 정치개입과 권력욕이 빌미가 돼 자신이 맹신했던 박 대통령과 함께 79년 10월26일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전두환 정권때는 장세동 전안기부장이 실세로 군림했다. 장씨는 용팔이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용팔이 사건에는 나 이상의 배후는 없다”고 주장, 전 대통령에 대한 강한 의리를 과시했다. 또 출소한 뒤에는 전 대통령을 찾아가 “각하. 휴가 잘 다녀왔습니다”라는 인사말을 건네기도 했다.“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는 말을 남겨 ‘의리의 사나이’로 통하고 있는 장씨는 지금까지도 전 대통령에 대한 변치않는 충성심을 과시하고 있다.박철언 전의원은 ‘6공의 황태자’로 통했을 정도로 노태우 정권때 실세로 군림했다. 정치자금은 물론, 공천과 인사권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하지만 박 전의원은 YS(김영삼 전대통령)정권 출범이후 슬롯머신사건(93년)에 연루돼 구속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93년 5월 의왕구치소에 수감된 박씨는 자신의 보좌관에게 “새벽이 왔다고 소리치면서 닭의 목을 왜 비트는지 모르겠다”는 메모지를 통해 YS에 대한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YS의 차남인 현철씨는 문민정부 시절 ‘소통령’으로 불리며 무소불위에 가까운 권력을 행사했다. “모든 권력은 소통령(김현철)으로 통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자연히 정치자금과 인사 청탁 등도 현철씨에게로 몰렸다.하지만 현철씨는 97년 5월 한보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전격 구속, ‘현직 대통령 아들 사법처리’라는 오명을 남긴채 권력의 뒤안길로 물러났다.DJ(김대중 전대통령)정권때는 박지원씨가 실세중의 실세로 통했다. 그를 지칭할 때 ‘부통령’이니 ‘대(代)통령’이니 하는 수식어가 따라붙을 정도였다.박씨가 국민의 정부 출범이후 청와대 대변인, 문화관광부장관, 정책기획수석, 정책특보, 대통령 비서실장 등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다는 사실은 그가 명실상부한 DJ정권 2인자였음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박씨도 과거 정권 2인자들처럼 영어의 몸을 피하지는 못했다. 박씨는 지난 6월 대북송금 사건과 관련해 구속됐다.박씨는 구속되기 직전에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라는 조지훈의 ‘낙화’ 시구를 인용해 자신의 소회를 피력했다. 이는 권력을 잃고 떠나는 자신의 신세와 권력의 무상함을 비유한 것으로 풀이된다.이처럼 과거 정권의 권력2인자들은 한결같이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또 실세들의 잘못된 권력욕은 부정부패를 양산했고, 국정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사실도 역사는 일깨워 주고 있다.이러한 역사의 교훈에 비춰볼 때 집권한지 9개월여 밖에 지나지 않은 현정권에서 ‘소통령’이니 ‘사설 부통령’이니 하는 실세 논란이 불거지고 있는 것은 참으로 걱정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거침없는 언행으로 ‘사설 부통령’ 시비의 단초를 제공한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외에도 노 대통령의 많은 측근들이 각종 비리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도 큰 문제다.권력의 힘으로 비리를 축소·은폐하려다 더 큰 화를 자초한 과거 정권 사례도 적지 않다. 따라서 노 대통령은 국정혼란의 단초가 되고 있는 측근비리와 관련해 하루빨리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무거운 짐을 덜어내지 못한다면 이 짐은 남은 4년 임기내내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특히 임기말 증후군인 ‘소통령’이니 ‘부통령’이니 하는 권력2인자 논란을 당장 차단시키지 못한다면 노 대통령 역시 과거 정권의 나쁜 선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홍성철 anderia10@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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