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명박 대선 예비후보의 주민등록초본 불법발급에 대한 논란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이 후보의 주민등록초본이 쉽게 유출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서울에 등록돼 있는 1만2000여 개 사채업체가 마음껏 호적등본을 발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자가 실제로 사채업자의 개인정보 수집수법 등을 알기위해 사채업자 지망생을 가장, 서울 명동에 위치한 한 사채업체에 위장취업해서 기본적인 수법을 배워본 결과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국민 누구나 호주의 이름과 본적을 알면 단 5분이면 가능했다. 재벌회장의 호적등본도 쉽게 발급받을 수 있었다. 이들은 고객 정보를 떡 주무르듯 가볍게 조회했다. 사채업자의 전모를 잠입취재로 파헤쳐봤다.
최근 들어 금융권, 공공기관, 기업체에서 잇따라 신용정보 유출이 발생하면서 신용정보 보안에 대한 중요성이 날로 높아져가고 있다. 이런 사회분위기와는 달리 사채업자의 하루는 채무자의 정보를 열람하고 추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규모가 있는 업체는 추심기능을 다른 사채업자에게 맡기고 10%의 성과급을 주는데 이것도 현행법상 불법이다. 하지만 타인을 대행시켜 업체의 빚 독촉을 공공연히 하고 있는 현실이다. 일부 제도권 금융기관(저축은행)은 채권추심을 사채업자에게 맡기는 위험천만한 일도 벌어지고 있다. 가족이나 친척이 사채를 빌려 썼어도 어느 날 사채업자가 당신 집을 찾아가 협박할지도 모른다. 사채업자들이 집을 어떻게 찾아낸 것인지 궁금할 것이다.
동사무소 직원 법원행정처에 민원제기
의외로 방법은 간단했다. 채권자는 채무자가 지불각서 등을 제출하면 채무자의 주민등록원초본(이전 주소지 포함한 주민등록초본)을 발급받는다. 이후 원초본에 나온 정보로 호적등본을 발급받아 가족 중 한사람을 골라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해 지불각서를 위조하고 다시 위의 과정을 반복하면 가족추심을 위한 가족의 주소를 알 수 있다. 현행 호적법의 허점을 악용해 호적등본을 발급받으면 그 속에 모든 가족의 정보가 다 나와 있기 때문이다. 호적등본에는 가족 구성원
전원의 주민등록번호와 이혼, 결혼, 출생, 분가, 사망, 입양 등 주민등록등본보다 훨씬 더 많은 개인정보가 담겨있다.
최근 2005년 개정된 ‘호적법 시행규칙 서식26-1의 조항(1)의 삭제 및 보완’을 요구하는 내용의 민원이 법원행정처에 제기됐다. 요지는 사채업자들이 너무 쉽게 전 국민의 개인정보를 빼내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 제보자는 공교롭게도 동사무소에서 호적등본을 발급해 주는 업무를 담당하는 일선 공무원이었다. 수년간 일선 동사무소에서 호적발급 업무를 해 온 K씨는 불법 사채업자 등으로부터 꾸준히 타인의 호적등본을 수십 차례 발급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K씨는 호적법 시행규칙에 따라 호주 이름과 본적만 알면 누구나 호적등본을 발급받을 수 있으므로 의심 없이 발급해 주었다. 하지만 사채업자들은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가린 채 발급되는데도 불구하고 뒷부분까지 공
개하도록 요구했다.
일반인이 호적등본을 뗄 경우 주민번호 뒷부분은 가리고 떼어주지만 호적법 시행규칙 서식 26-1 조항에 따르면 (1)신청인이 신청대상자의 주민등록번호를 정확하게 기재할 경우 (2)신청인이 호주 또는 그 가족인 경우 (3)재판 제출용인 경우 (4)공용 목적인 경우에는 호적등본에 있는 모든 구성원의 주민등록번호를 공개하도록 돼 있다.
불법 사채업자 개인추심 점입가경
서울에 위치한 동사무소 여러 곳을 며칠간 돌며 호적등본을 발급해 본 결과 단 한 곳도 발급 사유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현행법상 호주의 이름과 본적만 알면 불법이 아닌데 물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주민번호만 알면 가족주민번호가 다 나온다는 정보를 가르쳐 주는 곳도 있었다.
A동사무소 호적담당 L씨는 “동사무소 직원이 호적등본 발급 사유 등을 보고 신청자가 수상해도 확인 작업을 할 시간과 방법이 없다”며 “호적등본을 본다고 전화번호가 등록된 것도 아니고 설사 전화를 안다고 해도 전화를 시도하고 연결되는 것이 보통일이겠느냐”고 하소연 했다. 또 다른 호적담당 B씨도 “일선 공무원들 사이에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며 “이렇게 유출된 주민등록번호는 주인도 모르는 사이 대포통장을 만드는 등 범죄에 악용 될 소지가 높다”고 주장했다.
민원을 제기한 K씨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호적에 관한 업무는 대법원이 각 지자체에 위임한 사무로 지자체와 법무부로 이원화돼 생기는 문제라는 것이다.
지자체의 행정은 현재 행정자치부 관할이다.
이와 관련해 법원행정처에서 호적, 국회법률 개정을 담당하는 남성민 판사는 “법이 가지고 있는 내제적인 한계가 있어서 법률적인 부분에 분명 허점은 있을 수 있기 마련이다”며 “내년이면 호주제가 폐지돼 원천적으로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덧붙여 “호주제 폐지는 40년 만에 통과돼 내년부터 신분관계등록제로 변경 된다” 며 “법령검토 등의 작업이 많아 새로운 법안 마련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내년 호주제 폐지되면 방지 가능
하지만 일각에서는 개정까지는 4개월간의 공백이 있는데 그때까지 개인정보 유출을 막을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공공기관의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법률을 담당하는 행정자치부의 제도정책팀 담당자는 “현재 호적등본 발급 체계에는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며 “법원행정처에서 협조가 들어오면 호적담당 공무원들에게 공문을 발송해 주민번호 유출을 막을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재 사법부와 행정부가 민원업무와 관련된 같은 전산시스템을 이용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법부는 현재 전산상에서는 주민번호를 가린 채 발급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고 행정부는 사법부의 협조 공문이 있으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조속히 두 기관이 보완책을 마련해 개인정보 유출을 막아야 할 것이다.
김종훈 fun@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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