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관계자들도 대선자금에 관한 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노 대통령이 정면돌파 의지를 피력한 배경에는 정치개혁과 맞물린 또다른 노림수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그동안 우리 정치권에서 대선자금 비공개는 불문율로 통했다. 대선자금 내역과 관련한 문제는 과거에도 뜨거운 논쟁거리였지만 그 실체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지난 16대 대선 과정에서는 여야 정치권이 대선자금 내역공개를 합의했지만 이 역시 각 당의 불성실한 신고로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말았다. 이번에도 대선자금의 실체는 열리지 않는 판도라의 상자속에 묻어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 7월23일 집권 여당인 민주당(분당 이전)이 스스로 ‘16대 대선 선거자금 수입 및 지출 내역’을 발표, 대선자금과 관련한 국민적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시킬 수 있는 계기를 조성했다는 점이다.
당시 민주당 사무총장이었던 이상수 의원이 밝힌 대선 자금 내역서에 따르면 민주당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 총 402억5,398만원을 모아 이중 361억4,639만원을 지출한 것으로 나타났다.수입 내역을 보면 후원금이 145억1,261만원으로 가장 많았고, 대선후 선관위로부터 돌려받은 비용인 선거 보전금이 133억4,157만원, 대선전 국고에서 지출된 선거 보조금 123억9,978만원 등이었다.지출내역은 선거비용(280억8,77만원)과 정당 활동비(81억3,761만원)가 대부분이었다.이처럼 민주당이 과거의 불문율을 깨고 대선자금 내역을 전격 공개했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공개한 액수가 이 정도니 실제 자금은 최소한 이 보다 몇 곱절 많을 것이란 게 국민들의 지배적인 시각.특히 후원금 액수(145억원)와 관련해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또 이러한 반응과 국민적 의혹은 SK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더욱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다.
검찰 수사 결과 한나라당이 SK로부터 100억원을 수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민주당도 SK를 비롯한 삼성·LG·롯데·현대차 등 5대그룹으로부터 25억원에서 7억원을 수수한 사실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한나라당은 아직까지 대선자금 내역을 전혀 밝히지 않고 있지만 지난해 대선 당시 원내 1당이었고, 대선후보인 이회창 전총재가 노무현 대통령과 박빙의 승부를 펼쳤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후원금 등 대선자금 규모가 민주당 못지 않을 것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정치권 관계자들은 지난해 대선정국 중반까지만 해도 ‘이회창 대세론’이 확산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나라당에 훨씬 많은 기업 후원금이 몰렸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실제로 검찰 수사결과 SK그룹이 한나라당에 100억원을 건넨 반면 민주당에는 25억원을 전달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은 이같은 관측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또 ‘SK비자금’ 사건을 수사중인 대검 중수부는 지난 30일 구속수감된 한나라당 이재현 전 재정국장으로부터 한나라당사 최돈웅 재정위원장 사무실에 SK 100억원 외에 `또다른 돈’도 함께 보관돼 있는 것을 보았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검찰에 따르면 이씨는 지난해 대선 직전 재정위원장실의 가로 3m, 세로 5m, 높이 1.2m 공간에 SK(100억원) 돈을 포함한 현금을 담은 라면박스, A4용지 박스 등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신권 기준으로 100만원 돈다발의 크기는 가로 16.1㎝, 세로 7.6㎝, 높이 1.1㎝로 부피는 134.5㎤다. 따라서 이 돈다발이 가로 3m, 세로 5m, 높이 1.2m의 공간에 꽉 찬다고 가정했을 때 이 돈의 규모는 1,300억여원에 달한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씨가 SK 비자금을 5차례에 걸쳐 최돈웅 의원의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당사로 나른 마지막 날은 작년 11월26일이다. 즉, 대선 20여일을 앞둔 시점에서 한나라당 당사에는 최대 1,300억원에 이르는 괴자금이 쌓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씨는 검찰에서 사무실 케비닛과 4단 파일 케비닛에 1만원권 현금다발을 넣어두었다는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이 돈까지 합할 경우 이씨가 한나라당 재정국 사무실에서 본 괴자금은 최소 1,000억원을 상회할 것으로 관측된다.따라서 검찰은 이씨의 진술을 토대로 이 정체불명의 돈더미가 어떤 경로로 한나라당에 유입됐는지 여부와 그 용처를 파헤치는데 수사력을 집중할 방침이다. 더불어 한나라당이 SK외 다른 대기업들로부터도 거액의 대선자금을 현금으로 제공받은 단서를 포착하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검찰은 또 민주당이 지난 대선과정에서 SK를 포함한 삼성, LG, 롯데, 현대차 등 5대 기업과 두산, 풍산 등 일반 기업으로부터 수수한 대선자금 관련 자료를 입수해 불법성 여부를 확인중인 것으로 알려졌다.이처럼 여야 대선자금과 관련한 검찰수사가 재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선자금 전모를 밝혀야 한다”는 노 대통령의 발언은 정치권을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의 ‘대선자금 전모 공개’ 주장 배경에는 뭔가 정치적 노림수가 숨어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야권에서 ‘정치권 새판짜기’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노림수와 맞물려 있다.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의 간담회 내용이 모호해 국민에게 혼란만 가중시켰다고 혹평하면서 노 대통령의 대선자금·측근비리에 대한 특검 수용을 거듭 촉구하고 나섰다.한나라당은 또 노 대통령의 기자간담회를 계기로 대선자금 수사가 사실상 전면화됐다고 판단하고 전략기획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중장기 대책마련에 착수했다.민주당도 현재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수사 범위에 대해 언급한 것은 월권행위라며 노 대통령의 발언 배경에 의구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당은 정치개혁을 이뤄내기 위한 대통령의 굳건한 의지 표명이라며 지지의사를 분명히 했다. 우리당 이평수 공보실장은 “대통령직까지 걸고 재신임을 묻겠다던 대통령의 정치개혁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재확인된 언급”이라며 “한나라당의 특검법안은 자신들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에 대한 검찰수사를 막아보려는 정치술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이처럼 대선자금 수사와 관련한 노 대통령의 발언 배경을 놓고 여야 비공개가 정치권이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대선자금 열쇠를 쥐고 있는 검찰의 향후 수사 추이에 정가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또 그동안 비공개가 정치권의 불문율로 통했던 대선자금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경우 정치권은 빅뱅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홍성철 anderia10@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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