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편의 글을 실은 이날짜 동아일보는 서울 거리를 석권하였다. 사람들은 “동아일보요!”, “동아일보 특보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동아일보 사설 보세요!”라고 외치는 가판 소년들의 말을 듣고 너도나도 이 신문을 샀다. 독자들의 눈이 일제히 이 사설로 쏠렸다. 독자들은 과감하고 시원스럽고 치밀한 논리로 전개한 이 만능이 아닌 국민투표를 박정희 정권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려는 작태를 개탄하며 울분을 토로했다.아직도 극복되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하나의 사고방식이 있는데,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므로 국민은 언제든지 그리고 마음대로 국민투표의 방법으로 헌법을 ‘개정’할 수가 있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국민투표를 이처럼 만능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심히 경솔하고도 위험한 일이라고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다.”이처럼 국민투표를 만능으로 생각하는 권력자의 관점을 단도직입적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이 사설은 시작된다.
이 사설은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의 문제점을 세가지 관점에서 제기하고 있다. 첫째, 개헌은 국회에서만 할 수 있다는 법의 일반원칙에 위배된다는 점이다. 사설은 “우리 헌법은 오로지 그 헌법상의 국회에 의하여서만 개정될 것을 원칙으로 하였고 그리고 국민투표의 방법에 의한 개헌절차는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따라서 만일 군정당국에서 헌법 중의 몇 조문을 고친 다음에 국민투표에 부쳐 그것에 대한 국민의 승인을 얻기로 한다면, 그것은 결코 기존헌법이 개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조문내용이 근사한 신헌법의 제정이 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이 사설은 “국민투표를 주장하는 것은 ‘개정 형식’을 밟는 것처럼 가장하고서 신헌법을 ‘제정’해 버리자는 지극히 위험한 사고방식이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것은 권력의 핵심부를 향한 준엄한 논고를 연상케 한다. 둘째, 국민투표의 형식을 빌린 헌법의 사실상 ‘제정’은 국가의 정통성을 훼손한다는 점이다. 사설은 “우리의 정부가 1948년에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로써 구성된 국회에 의하여 제정된 헌법을 가지고 있고 그 헌법에 의하여 조직된 정부로서 존속하는 한에 있어서 그러한 정부승인을 계속 보유할 수가 있는 것이며, 만일 그 헌법을 일축하고 새로이 헌법을 만드는 경우에는, 비록 그것이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다수의 지지를 얻는다고 할지라도 유엔의 승인은 그 효력을 상실하고, 유엔과의 관련의 밑에서 지금까지 이 땅에서 이루어 놓은 위대한 사업을 모두 백지로 환원한다는 무서운 이론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이 사설은 “조국이 지금까지 10여년간 대공투쟁을 해온 업적을 무로 돌리고, 그 흉악한 북괴와 국제무대에서 동등한 입장에 서도록 해도 무방하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우리는 그를 애국적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인데, 국민투표를 주장하는 견해를 이론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바로 이러한 비애국적인 결론에까지 도달하고야 만다는 것을 우리는 승인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라면서 유엔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부의 정통성 문제까지 거론했다. 셋째, 군정 당국이 민주헌법을 개정하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점이다. 이 사설은 “군정당국에서는 개헌을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결론을 가져오게 한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논거로서 “우리의 군사혁명이 구악을 일소하고 조국을 굳건한 민주토대 위에 올려 놓는 것을 목적으로 할 뿐이요, 조국의 민주적 기본체제 그 자체에 손을 대는 것이 그 본의가 아니었다는 점을 반성해 본다면 당연하고도 또 당연한 결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서 이 사설은 “민주반공국가의 국민으로서 이론상 정략상 한가지만을 고수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헌법의 개정은 우선 제2공화국헌법에 의한 국회를 구성하고 난 다음에라야 비로소 논의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다시 말하면 군사정권이 국회 아닌 곳에서 헌법 조문을 손질하여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은 민주적 헌법질서에 위배된다는 점을 이 사설은 분명히 지적했다. 결국 국민투표는 국민주권을 빙자하여 법을 초월한 힘으로 독재를 구축하려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당시 군정을 총괄하고 있던 박정희 장군은 이른바 ‘혁명공약’ 제6항대로 청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군 본연의 임무로 복귀하느냐, 아니면 권력을 계속 장악하여‘혁명과업’을 완수하느냐의 문제로 한 때 내부 갈등을 겪었다. 박정희의 고뇌도 깊어졌다. 그러나 권력은 한번 장악하면 결코 놓고 싶지 않은 마력의 대상이라는 것이 동서와 고금의 역사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권력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부르는 사람마저 있다. 처음부터 권력과 상관없이 사는 선승 또는 수도자라면 몰라도 권력과 직간접으로 연결고리를 맺고 사는 사람은 권력을 다른 사람 또는 정적에게 헌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만큼 권력은 인간을 지배해온 강력한 이데올로기다.
박정희는 쿠데타로 제2공화국의 장면정권을 전복한 후 국회를 해산한 다음에 국가 권력의 중추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두고 이곳으로 하여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토록 했다. 이 기구의 의장이었던 박정희는 여기서 제3공화국 헌법을 ‘제정’하여 국민투표를 통해 이것을 확정하려고 책동하고 있었다. 이것은 불법적인, 또는 초법적인 쿠데타에서 합법적인 정권으로 변신하려는 그의 작전을 드러내고 있다. 천하를 호령했던 중앙정보부가 발칵 뒤집혔다.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으로서 ‘제4부’로도 불리는 언론사를 자기들의 안방 드나들 듯이 하면서 “이 기사는 빼라, 저 기사는 키우라”는 식으로 명령 아닌 명령을 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폭력으로 보복하던 중앙정보부는 국가의 안보를 위해 존재하던 기관이라기보다는 정권의 안보를 위해 존재하던 폭력의 산실이었다.
중앙정보부는 구수회의를 거듭한 결과 1962년 8월 2일 이 사설의 필자인 황산덕 논설위원과 고재욱 주필을 1962년 8월 2일에 체포하여 구속했다. 필화사건으로 주필과 논설위원이 동시에 구속된 사례는 한국 언론사상 처음 있는 청사에 우뚝 선 쾌거였다. 이 사설 파동은 동아일보사가 군정하에서 겪은 수난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것 중 하나였다. 두 사람은 얼마 후 석방됐다. 그러나 그 후 동아일보사는 더욱 가혹한 감시를 받았다. 황산덕씨는 당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법철학과 형법을 담당한 명성이 높은 학자였다. 그는 서울법대에 적을 두고 동아일보사에서는 비상임 논설위원으로서 활약하고 있던 터였다. 그가 쓴 사설은 개인 견해가 아니라 동아일보사의 견해요, 법학자로서의 철학과 논리를 바탕에 깐 회심의 일작이기도 했다. 국민투표를 만능의 묘약처럼 이용한 박정희는 한국 정치를 압살한 이른바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1972년 11월에 실시하여 91.9%의 투표에 91.5%의 찬성을 얻는 등 북한의 투표율을 뒤좇는 놀라운 결과를 이끌어냈다.
그는 또 민주화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과정에서 1975년 2월 또다시 국민투표를 이용하여 79.8%의 투표율에 73.1%의 찬성률을 이끌어냈다. 이처럼 거의 모든 국민투표는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다. 권력자들이 국민을 이용하면 정치적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 후 우리 국민은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민주화 투쟁에 나서 군사정권을 끝장내고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출범시키면서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정착시켰다. 특히 노무현 정부는 젊은 세대들이 대선전에 앞장서 기획, 동원, 모금 등을 책임지고 역전승을 이끌어낸 ‘선거혁명’으로 평가받았다.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개혁 일변도의 정책을 펴고, 이른바 386세대를 주축으로 한 협소한 인재풀을 고집하며, 부정과 부패에 대한 안전판을 장치하지 못하고, 의회의 소수세력이 겪는 한을 삭이지 못한 채 집권 초기에 국민의 지지율이 20% 안팎에 머무는 초유의 사례를 기록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10월 10일 갑자기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시행하겠다고 발표하여 또다시 국민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있다. 돌파력이 강한 노대통령의 국민투표 결행 방침은 고 박정희 대통령처럼 독재의 발판을 굳히려는 수단이라기보다는 위기 탈출용 카드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행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 안위(安危)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고 하여 대통령에게 국민투표 회부권을 부여하고 있지만 국민투표의 요건을 제한하고 있다. 또 제130조는 “헌법개정안을 국회가 의결한 후 30일 이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국회의원 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고 하여 헌법 개정을 하는 경우는 국회에서 통과하더라도 국민을 상대로 그 확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의무화하고 있다.
그러나 노대통령의 국민투표 구상은 특별한 이슈를 걸지 않고 단순히 재신임을 묻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 경우 국민투표는 위헌 시비에 휘말릴 수 있으며,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야당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대통령이 단독으로 결행하기도 어려운 카드가 아니냐는 관측이 대두되고 있다. 국민투표는 황산덕씨가 적절하게 지적한대로 “만능이 아니다”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것은 권력자가 국민을 동원하는 커다란 모험이자, 극약 처방이다. 역사는 국민이 특정인을 위해 극약을 복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교훈을 헌정사의 한 페이지에 새겨놓고 있다.
이태호 대기자 약력
·1945년 전남 나주 생·서강대학교 사학과 졸업·1970~1975년 동아일보 기자·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발기인 및 편집위원보·1989년~1994년 평화신문 편집국장 대리, 평화방송 해설위원·(현재) 사회평론가, 프리랜서·주요저서 : 『70년대 현장』 『80년대의 상황과 논리』 『압록강변의 겨울』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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