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인은 지난해 12월 뇌졸중 치료를 받은 이후 합병증으로 폐렴을 앓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으로는 부인인 소설가 한말숙 씨와 아들 황준묵, 황원묵 씨, 딸 황혜경, 황수경 씨 등이 있다.
고인은 우리 음악계의 전무후무한 예술가로 통한다. 탁월한 연주력을 뽐낸 건 물론 가야금 창작곡을 개척한 주인공이다.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 동란 피란시절인 중학교 3학년 때 1951년 부산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을 배운 황병기는 서울대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법대 3학년 재학 중 KBS에서 주최하는 전국대회에 나가 1등을 하며 국악 재능을 알렸다. 1950년대 당시에는 국악과가 없었기 때문에 법을 공부했다. 서울대 음대가 생긴 건 1959년이었다.
음악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황병기는 1960년대 극장 지배인, 출판사, 화학공장 기획관리 등의 일을 했다.
1970년대 한양대, 이화여대 등에 국악과가 생기면서 국악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기로 결심했다. 1974년 이화여대 교수로 부임하며 음악을 전업으로 삼았다.
1962년 서정주의 시에 곡을 붙인 '국화 옆에서'를 통해 가야금 연주자로 첫 발을 내디뎠다. 같은 해 한국 최초의 가야금 현대곡으로 통하는 '숲'을 창작했다.
'숲' 이후 왕성한 창작 활동과 다양한 음악적 실험으로 이름을 드높였다. 해외에서도 주목 받았다. 특히 1964년 국립국악원의 첫 해외 진출이기도 했던 요미우리 신문사 초청 일본 순회공연에서 가야금 독주자로 참여해 호평 받았다.
1965년 하와이에서 열린 '20세기음악예술제' 연주를 시작으로 뉴욕 카네기홀을 비롯해 세계의 주요 공연장에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쳤다.
창작음악 중에서는 1974년 신라 음악을 되살린 '침향무'가 대표작으로 통한다. 불교 음악인 범패의 음계를 바탕으로 동양과 서양의 공통된 원시 정서를 표현한 작품이다.
이와 함께 1975년 명동 국립극장에서 초연한 '미궁' 역시 황병기의 대표작으로 통한다. '미궁'은 첼로 활과 술대(거문고 연주막대) 등으로 가야금을 두드리듯 연주하고 무용인 홍신자의 절규하는 목소리를 덧입은 파격 형식의 곡이었다.
2000년대 들어 미궁 관련 괴소문이 퍼지면서 젊은 층에서 관심을 가졌다. 2001년 발매된 '화이트데이: 학교라는 이름의 미궁'에서 메인 BGM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고인은 남북 교류에도 상징적인 예술가였다. 1990년 북한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에 공식 초청을 받았고 같은 해 송년통일음악회 집행위원장으로 일했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지냈으며 이화여대 명예교수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있었다.
저서로는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 '가야금 선율에 흐르는 자유와 창조 - 황병기의 삶과 예술 세계'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논어 백가락' 등을 남겼다.
빈소 서울 아산병원 30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2일이며 장지는 용인천주교묘원이다.
오두환 기자 odh@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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