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자금으로부터 자유로운 측이 어디 있느냐. SK로부터 100억원을 받은 것은 백번 잘못한 일이다. 그렇지만 한나라당만이 불법 대선자금을 받은 것처럼 몰고 가서는 안된다. 그동안 대선자금 수수는 정치권의 불문율 아니었나. 이회창 전총재뿐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자금도 철저히 밝혀야 한다.”한나라당 고위 당직자의 말이다. SK비자금 문제가 결국 한나라당을 겨냥한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내비치며 “이대론 안당한다”며 전의를 붙태우고 있다. “지금은 한나라당 창당 이래 최대의 위기다. SK비자금과 재신임 문제에 대해 당 지도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사태를 이 지경까지 끌고 왔지만,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는다.”한나라당의 이같은 강경기조에는 최근 정국흐름에 대한 의혹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재신임을 받겠다”고 전격 선언한 것도 결국 SK비자금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 아니냐는 의혹이 한나라당 내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최근 정국 흐름의 최후 연출자가 노 대통령이란 것이 의혹의 출발점이다. 노 대통령의 대선자금 공개 선언→권노갑, 박지원 구속→박주천, 임진출, 안상영 검찰 조사→최돈웅 대선자금 수수 수사→한나라당 무력화→정치와 제도 개혁→총선승리로 이어지는 플랜을 갖고 있다는 게 한나라당 고위 당직자의 분석이다. 특히 한나라당 고위 당직자는 ‘검찰 내 노사모’라는 극한 용어까지 써 가며 수사의 순수성을 의심하고 있는 상태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은 향후 대응전략도 수립했다. ‘DJ를 벤치마킹 하라’는 게 그 전략. 노태우 전대통령으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는 의혹이 터졌을 때의 대응전략을 그대로 모방하자는 게 요지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은 100억원 수수를 시인한 뒤 노 대통령의 대선자금 수사를 요구할 계획이다. “대선자금으로부터 떳떳할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게 이 전략의 기본 원칙이다.한나라당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가 특검까지 주장하고 있다. 최병렬 대표가 10월26일 노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동에서 “형평성이 결여돼 있어 현 검찰로는 어렵다. 전면적이고 무제한적인 특검을 실시하자”고 요구한 것도 이 전략의 일환이다. 나아가 한나라당은 ‘탄핵정국’으로 정국을 급선회할 의중도 갖고 있다. 특검을 통해 노 대통령 주변에서 불법선거 자금 수수가 드러나면 탄핵도 각오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 한나라당 주변에서 공공연하게 나온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에선 최도술, 안희정씨 등 노 대통령 주변인물의 뒷조사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또한 한나라당에선 열린우리당의 신당자금 조성 의혹도 조사 중이다. 그동안 정치권에 나돌았던 풍문을 중심으로 정치자금 조성 부분을 캐고 있다.
한나라당 고위 당직자는 “노 대통령 주변에 대해 전방위적 조사를 벌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SK 비자금 100억원 수수는 곧바로 이회창 전 총재의 향후 정치행보에도 큰 영향을 줬다. 당장 이 전 총재는 출국일자를 잡지 못하고 있다. 당초 11월 초 출국하려 했으나, 지금은 출국날짜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 SK 비자금 수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출국할 경우, ‘쫓겨 나가는 것’처럼 비쳐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당직자들은 “SK비자금 수사가 자칫 이회창 전 총재의 정계복귀 촉매제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SK 비자금 사건 이후 이회창 전 총재 측근들의 움직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게 당내의 관측. 그동안 별다른 움직임없이 조용히 지내던 이 전총재의 측근들이 근래들어 부쩍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전 총재의 핵심 측근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SK 비자금에 대처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나라당 당직자들 사이에선 “대선에서 패배한 이회창 전 후보의 대선자금을 수사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대로 가면 정치탄압이 될 수밖에 없다”며 “이 전 총재가 정치적 명분을 바탕으로 전격적으로 정치에 복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민주당도 ‘당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 민주당 고위 당직자는 “처음 노 대통령이 재신임 문제를 언급할 때만해도 그 의도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다”며 “이제는 노 대통령이 재신임 문제를 왜 들고 나왔는지 분석이 됐다”고 말했다. 재신임 문제와 SK 대선자금 문제가 불거진 것은 궁극적으로 정치권과 제도개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는 게 민주당의 시각이다. 정치·제도 개혁을 통한 총선승리가 궁극적인 목표라는 게 민주당의 분석이다.
노 대통령은 4당 대표들과의 청와대 회동에서 “이런 때 반성도 하지 않고 개혁의 성과도 없다면 공멸할 수 있다”며 정당에 대한 기부금의 완전공개, 정치자금 공소시효 연장 등 정치개혁 방안을 제안했다. 이뿐 아니라 총선 이후 노 대통령의 정치구상과도 최근 상황이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게 민주당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신3자연대’가 그것. ‘한나라당+우리당+노 대통령’ 등 ‘3자연대’가 목표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총선 이후의 구도다. 이 때문에 민주당은 ‘야합음모’라는 의혹까지 갖고 있다.
민주당의 고위 당직자는 “노 대통령이 호남대 비호남 구도로 정치권을 재편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이같은 인식에 대해 청와대나 우리당은 강하게 부인하고 있는 상태. 노 대통령도 4당 대표들과 청와대 회동에서 “검찰 수사는 내가 말릴 수도 없고 말릴 생각도 없다”고 했다. 사실상 검찰이 독자적으로 수사를 하고 있어 정치적인 의도가 없다는 것이다. 이같은 인식은 우리당도 같다. SK로부터 민주당도 대선자금을 수수했다는 수사를 받은 것이 그 반증이라는 것. 따라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에서 주장하고 있는 ‘음모론’은 전혀 근거없는 얘기라는 게 우리당의 입장이다.
이형운 leho@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