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남마을 암매장 두 청년의 넋 30년만에 ‘부활’
주남마을 암매장 두 청년의 넋 30년만에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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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05-31 17:01
  • 승인 2010.05.31 17:01
  • 호수 840
  • 6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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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뜻은 저희가 이어가겠습니다. 5·18 영령들이여, 편히 잠드소서.”

5·18 당시 영문도 모른 채 계엄군의 총탄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두 청년의 영혼이 30년 만에 위령비로 부활했다.

옅은 회색빛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던 80년 5월 23일 오후 2시께. 광주시 동구 지원동 주남마을 인근에 매복하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마을 앞을 지나던 소형버스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이날 총격으로 승객 18명 중 한 명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숨졌다. 귀를 찢을 듯한 총성은 바람결에 실려 주남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이윽고 군인들은 누군지 모를 시신을 옮겨왔고, 탱크를 앞세워 일주일 간 마을에 주둔했다. 사람들은 그 후로 숨죽여 살아야만 했다.

이로부터 9년이 지난 89년 1월 5일. 주남마을 계곡에서 암매장된 시신 2구의 유골이 발견됐다. 이 시신은 채수길(당시 23세)씨와 양민석(당시 20세)씨로 밝혀졌다. 공수부대원이 쏜 총탄에 맞아 신음하던 이 청년들은 또다시 주남마을 뒷산에 끌려가 확인 사살 당한 뒤, 계곡에 묻혔다. 당시 살아남은 홍금숙(여·16·당시 춘태여고 1년)씨만이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증언했을 뿐이다.

원통하게 숨진 두 젊은 영혼이 ‘오월 정신’을 잇고자 하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사건 30년 만에 되살아났다. 그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지난 5월 24일 주남마을에서 두 청년의 혼을 달래는 위령비 제막식을 연 것이다.

마을회관에서 뒷산으로 이어지는 오른쪽 농로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높이 1.5m, 폭 0.7m로 세워진 위령비는 ‘1980년 5월 광주, 피지도 못하고 짓밟힌 두 청년의 넋을 위로하며 작은 돌비를 세웁니다’라는 말로 원혼을 달래고 있다.

이 위령비에는 당시 주남마을에서 살았고 5·18을 기억하는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5·18위령비건립추진위원회’ 30인의 이름이 모두 들어갔다.

위령비를 제작한 양문기(41)씨는 “암매장된 시신이 두 사람이라는 것과 더불어 당시의 아픔을 표현하기 위해 돌의 가운데를 쪼개 두개의 위령비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상기(79) 5·18위령비건립추진위원장은 “당시에는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어. 군인들이 총을 메고 다니고, 아이들에게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이 정미소집 아들이 총을 맞았지. 이제서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아. 가끔 찾아가 청년들도 쓰다듬어주고…”

주남마을 회관 앞에는 마을 지도와 이정표도 설치됐다. ‘주남마을 양민학살’에 대한 간단한 역사와 학살지역과 발포지역·매장지·공수부대 주둔지 등이 그려진 지도를 통해 외부인들이 ‘역사의 현장’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광주 YMCA ‘민주인권마을사업단’은 주민 30명의 진술을 그대로 담은 ‘주남마을이 들려주는 5·18 이야기(112쪽)’를 이날 발간 배포했다.

[호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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