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족은 고 정몽헌 회장을 경기도 하남 가족묘에 안장하되 머리카락 등 일부만 금강산에 모시기로 했다.이와 함께 비록 몸은 아니지만 영정이 따로 모셔져 그의 넋이나마 위로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 도봉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도선사가 바로 그곳이다.도선사는 정몽헌 회장에 앞서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영정이 봉안된 곳이기도 하다. 도선사는 정주영 명예회장과 함께 박정희 전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등의 영정도 함께 모시고 있다.‘호국참회관음기도도량’이라는 별칭처럼 도선사는 나라와 민족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 모임의 장으로 불교계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조 광무제로부터 이미 국가 기원도량으로 지정받은 바 있는 도선사는 60년대 주지스님으로 청담스님이 오게 되면서 호국불교 사상의 요람이 되고 있다.
고 정몽헌 명예회장이 도선사와 깊은 관계를 맺어온 것은 아니다. 도선사의 전주지스님인 동광스님에 따르면 71년 청담스님이 운명하자 장례행사에 참석한 이후 크고 작은 행사에 참여했던 정도였다.그러나 92년 정 명예회장이 대선에 출마하자 종교계 포섭에 나서면서 도선사를 자주 찾게 됐다. 이때 물밑에서 도선사를 중심으로 불교계의 표밭을 다지던 사람은 따로 있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유일한 여동생 정희영 여사였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49제가 도선사에서 열린 것이나 그의 영정이 봉안된 것도 모두 정 여사가 추진한 결과다.정희영 여사는 한국프랜지공업의 회장을 지낸바 있는 정씨 일가의 대모. 독실한 불교신자인 정 여사는 92년 대선 당시 큰오빠(고 정주영 명예회장)를 도와 불교계를 무대로 종횡무진 활약했다. 그녀의 열성은 2002년 대선에서 조카인 정몽준 후보에 대해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당시 정 후보는 고모의 영향력에 힘입어 도선사를 비롯한 불교계에 폭넓은 유세를 펼칠 수 있었다.지난 4일 새벽 자살한 고 정몽헌 회장의 영정이 도선사 명부전에서 선친(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함께 나란히 봉안될 것이 확실시되는 것도 정희영 여사의 활동 때문이다.
기자가 도선사를 찾은 지난 5일, 고 정몽헌 회장이 자살한 다음날인 이날부터 이미 도선사 신도들 사이에는 정 회장의 영정이 모셔질 것이라는 얘기가 파다했다. 대부분 신도는 이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다.도선사의 운영 사무실이나 스님들은 공식적으로 “고 정몽헌 회장의 집안에서 요청이 있을 경우 논의 끝에 영정을 모실지 여부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집안’이란 구체적으로 정희영 여사를 지칭하고 있다. 정주영 명예회장때에도 그랬듯이 정 여사의 요구를 원로들이 받아들이면 정몽헌 회장의 영정도 도선사에 들어올 수 있다.정몽헌 회장의 장례가 치러지던 숨가쁜 와중에도 정희영 여사는 조카의 마지막 길을 다시 한 번 닦아주었다. 그의 신체 일부를 금강산에 옮기기 전에 잠시 도선사에 묵게 한 것. 정 여사가 평소 형제들과 조카들에 지극 정성이었다고 한 것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정 여사는 지금까지 언론 등에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항상 굵직한 가족사에 모두 참여해왔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에서부터 고 정몽헌 회장에 걸쳐 수차 이루어진 북한 방문에 그녀는 종종 이들과 함께 했다. 98년 10월 정주영 회장이 2차 방북했을 때와 올해 2월 금강산 육로 시범관광에 참여하는 등 일가의 대북 사업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여왔다.도선사 관계자들은 정희영 여사 등 정씨 일가의 요구가 있을 경우 충분히 고 정몽헌 회장의 영정을 봉안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도선사의 동광스님은 “정몽헌 회장은 나라를 위해 뜻깊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이라며 “그의 선친과 함께 쉬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지산 san@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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