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오전 청와대는 어수선했다. 예고에도 없던 청와대 춘추관에서의 노무현 대통령의 대국민담화문 발표 때문이다. 이날 청와대 출입기자는 물론 정치부장까지도 사전에 몰랐던 일이었다. 청와대에선 이날 오전까지도 각종 언론사에조차 개헌 발언에 관해 사전 통고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조차 예견치 못했다는 후문이다. 청와대에선 이날 홍보수석조차 몰랐다고 한다. 미리 정해 놓은 극소수의 개헌관련 멤버들만 알 수 있도록 철저한 보안 태세를 갖췄다는 전언이다. 이 때문에 출입기자들 사이에선 ‘D-데이’를 정해놓고 정무팀을 구성, 사전에 개헌과 관련해 해외자료 등을 수집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단기간에 걸쳐 일사천리로 준비할 사안은 아니라는 얘기다.
친노(親盧)성향인 열린우리당 김형주 의원도 “노대통령의 개헌 발언은 순간적으로 정리해 발표한 것이 아니다”며 “대선 당시부터 내건 공약이었던 만큼 그 준비 기간은 4년이었다”고 했다.
청와대 이병완 비서실장은 노대통령 담화발표 이후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정태호 정무팀장을 주축으로 관련 팀원 10여명이 2~3일정도 전부터 준비를 했다는 말까지 했다. 말하자면 정무 라인내 개헌연구팀구성 형태로 담화문 초안 작성 및 해외자료 등을 수집했다. 물론 언론이나 정치권에 노출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주듯 정 정무팀장은 노대통령의 담화문 발표가 있기 전인 지난 7일, 청와대 지인들과의 약속에도 불참했다는 후문이다. 담화문 발표 하루 전날(8일)에는 아예 정무팀원들 전체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다. 윤태영 연설기획 비서관도 이날 역시 이백만 전수석 및 출입기자 환송식에 참석하기로 했지만 불참했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이 담화문을 발표한 직후 이병완 비서실장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지난해 여름부터 청와대 비서실에 대선공약에 관한 내용을 지시했다”며 “그 후 작업에 들어가 정기국회가 끝날 무렵부터 자료 작성 등 구체적인 (개헌) 발표 준비에 들어갔다”고 했다.
노대통령이 개헌발의까지 결심하게 된 것은 결국 연말연초라는 얘기다. 노대통령은 이 시기 한명숙 국무총리와도 만나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그만큼 보안이 철저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일각에선 개헌 준비가 하루아침에 이뤄질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시각이다.
비서진에게조차 비밀
9일 오전 노대통령의 담화문 발표가 있기 1시간 전, 청와대에선 재미있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청와대 내부에서조차 노대통령의 담화발표를 몰랐다는 것이다.
홍보수석실에선 이날 오전 각 방송사 고위층에게 연락해 청와대 춘추관에서 생중계를 할 수 있도록 요청했고, 방송사는 부랴부랴 출입기자들에게 물어보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한 것이다. 모 방송기자는 방송사 고위층으로부터 “긴급생방송한다고 하는데 뭐냐”는 질문을 받고 영문을 몰라 “국무회의를 하는데요”라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청와대 출입기자들 사이에선 담화발표가 있기 전까지 다양한 추측성 얘기가 오고가기도 했다. 더구나 청와대 대다수 비서관들조차 “무슨 담화발표냐”고 물어볼 정도로 극비에 붙였다는 얘기다.
물먹은 각 방송·언론사 출입기자 및 정치부장은 이에 대해 홍보수석실에 강력 항의하자 홍보수석은 “갑자기 결정돼 서두르다 보니 그렇게 됐다”며 “미안하다.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사과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보안이 철저했던 이유는 노대통령의 대연정 발언이 가져다준 과거 여파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대연정 논의와 관련, 노대통령은 사전에 여당의 협조를 구했지만 결국 여당의 입을 통해 언론에 공개되면서 대연정 논의는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치권 일각에선 “노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기 전, 대선을 앞두고 노대통령 자신의 대선 공약으로 내건 개헌을 어떻게든 성사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관측했다.
풍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노대통령은 수차례에 걸쳐 개헌 논의를 국민과 정치권에 호소했다. 틈새공략을 펼친 것이다.
하지만 야권은 노대통령이 국정운영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될 때마다 꺼내드는 ‘이벤트용’으로 치부해왔다. 이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들고 나온 ‘개헌’관련 논의는 특히 한나라당의 공격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난해 2월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북한산 산행 이후 개헌에 관해 무관심해 보였던 노대통령. 그가 돌연 절묘한 시점에 개헌 발언을 했다는 점에서 심상치 않다는 시각이다.
특히 대선 경선을 앞둔 현 시점이 노대통령의 개헌논의 시기로는 가장 적절하다는 평가도 있다. 이날 노대통령의 담화발표는 의제가 처음으로 정치적인 분야였다는 점에서 언론 및 정치권이 긴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여파는 참으로 상당했다.
속 탄 청와대
9일 오전 11시 30분. 노무현대통령이 대국민담화를 통해 4년 연임제 개헌을 제안하기 전, 이병완 비서실장은 여야 대표들에게 사전설명을 시도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이 전화를 받지 않아 애를 태웠다는 것이다. 김 의장이 청와대 전화를 받지 않는 이유는 당·청간에 (개헌)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사전 통보 형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여당 핵심관계자는 이에 대해 “아침에 청와대측이 이 실장과 김 의장간에 전화연결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김 의장이 전화를 받
지 않았다”며 “대통령의 제안 내용엔 공감하지만, 발표 방식이 여야 구분 없이 사전 통보하는 식이라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고 귀띔했다.
사실 비슷한 사례는 지난해에도 발생했다. 당·청 갈등의 도화선이 됐던 여야 정치협상회의 때도 청와대는 충분한 사전 협의 없이 제안 직전에 이 비서실장을 통해 당 의장에게 일방통보식으로 연락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핵심 관계자는 또 “속이 탄 청와대가 이런 저런 경로로 연락을 해 ‘오후에 직접 찾아뵙고 말씀 드리겠다’라고 말을 해 이 실장과 김 의장간에 직접 면담이 성사됐다”고 설명했다.
김현 rogos0119@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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