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 현대상선에서 현대아산으로 대북사업 전권이 넘어가고 정 회장이 경영 전면에서 물러나며 정 회장은 대북사업에만 매달려왔다.정몽헌 회장은 현대자동차, 건설, 하이닉스 등 굵직한 계열사들을 잃은 상태이기는 했지만 그룹의 적통을 이어갔다. 또 선친에 이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격이었던 대북사업을 진행해왔다.일찍이 정주영 명예회장은 5남인 정몽헌 회장을 특별히 신임했다. 이것은 현대그룹 경영권의 향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89년 정주영 명예회장과 첫 방북 스타트를 끊은 그는 선친으로부터 대북사업 일체를 위임받았다. 86년 정주영 명예회장이 소 500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경유해 방북했을 때나 특히 9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했을 때 실무는 모두 정몽헌 회장이 맡았다.
이때부터 그룹에서는 정몽헌 회장이 명실상부한 후계자라는 전망이 은밀히 퍼지기 시작했다.정 회장의 본격적인 대북사업은 98년 11월 현대금강호 출항에서부터 시작됐다. 99년 2월에는 현대아산을 설립, 대북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2000년 정주영 명예회장이 타계하며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으로 대북사업 전면에 나섰다. 훗날 드러난 것이지만 2000년 6월에 있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수 있었던 막후에는 정몽헌 회장의 역할이 있었다. 송두환 특검에 이어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인 대북 송금이 정상 회담 성공의 주요 배경이 됐던 것.그러나 대북사업은 현대그룹을 돌이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몰아갔다. 우량계열사였던 현대상선을 경영난으로 몰아갔고 현대상선에서 사업권을 넘겨받은 현대아산은 몇 차례 자본 잠식 사태를 겪었다.정 회장은 2001년 6월 육로금강산관광 활성화 및 개성·금강산 경제 특구법 지정 공포 등 합의를 이끌어내며 제기를 향해 안간힘을 썼다. 올해 3월에는 비로소 금강산육로관광을 처음으로 실시하기도 했으나 이를 활성화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금강산관광사업이 지지부진해지며 일찌감치 ‘실패한 사업’으로 낙인찍혔다. 그럼에도 정 회장이 대북사업에 매달린 이유는 대북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줄 것을 당부한 선친의 유지 때문.평소 정 회장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유지를 받들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었다고 알려졌다. 문제는 경영정상화의 활로가 북핵 위기, 북미간 갈등 등 한반도를 둘러싼 신 냉전체제로 인해 막힌 것.또 대북 송금 특검과 현대 150억 비자금 사건 등 남북관계에 찬물을 끼얹는 악재가 연이어 터진 것도 대북사업을 공허하게 만든 요인이 됐다.재계의 한 관계자는 “현대와 정몽헌 회장의 대북사업은 기업인의 판단 기준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며 “그러면서도 정 회장이 좀 더 대승적인 차원에서 대북사업을 감행했던만큼 그에 합당한 평가를 내려줘야 한다”고 정몽헌 회장을 옹호했다.
김지산 san@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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